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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Sound 0034/ 1984 선택을 하는데 있어, 단순해 졌다고 할까? 뭐가 말이야?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복잡한 사안의 정답을, 고르기 단순해졌다는 거니? 응. 그랬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선택한다는 것은, 점점 더 단순해졌다. 요컨대 쉽게 선택할 수 있었다. 특별한 어려움 없이, 어떤 것이 단순한 것인지 생각하면, 되는 것이었다. 쉬웠다. 여행지를 선택하는 것이라던가, 혹 어떤 여자와 교제를 해야 하는 지 등. 일련의 복잡한, 또는 비교적 단순한 사안 등에선, 보다 더 단순한 것을 선택하면 그만이었다. 예전의 골몰하던 계산이나 비교 따위, 요행히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것 아니? 뭐? 자살한 사람들 말이야. 자살한 사람들이 뭐? 그들은 죽기 전, 얼마나 많이 자신을 ..
Sound 0033/ 1984 살아가는 것이란 무엇인가? 구걸하는 흐트러진 걸인도, 소주를 마시며 망연히 앉아있는 더러운 광인도, 그들을 스치는 부지런한 샐러리맨들, 젊은 연인의 달콤한 발걸음도, 살아가는 것이란 무엇인가에서는 무색해진다. 어떤 것이 한스러워, 비참한 표정으로 대낮 눈물을 훔쳐내는가. 먼지가 뿜어나는 지하철 환풍구 덮개엔, 통렬히 울고 있는 얼음 걸인의 광기에, 보도까지 노랗게 물들었다. 하나의 객체가 고난을 받는다거나, 해서 불운한 존재다 단정 지을 순 없을지라도, 그를 스치는 무수한 발걸음은, 비참한 심경으로 혀를 차며 자신 삶을 일부분 투영해준다. 미안하지만, 나도 비참하다네. 눈 속을 찌르던 고통, 비난할 수 없던 도회지인의 단호함. 어느 곳에나 걸인과 정상인의 모호한 범주는 규정..
Sound 0032/ 1984 잠자는 것은 달콤하니까. 영혼 없이 죽음을 상상하는 것. 좋지 않아? 대화는 좋아. 맘 속 묻었던 견해를 말하고, 사랑에 관한 낱말을 듣는다. 일어날 얘기도 나누지. 그런 풍요는 말하자면, 바다서 시작되던 것. 그것은 화가의 대지처럼 아름다움을 새롭게 창조했지. 날개 달고 전쟁을 경시하며, 꿈을 거부치 않았다네. 넌 억겁 동안 찢어진 돛대 아래 살면서, 밤낮 빛도 없는 도시의 명절, 현악 연주 없던 고독한 깃발 아래 살았지. 바다는 기억을 빼앗지 않았고, 전해주지도 않았다. 사랑은 두 눈을 고착시켜, 축조하는 당신 속 화가를 깨웠지. 그리고 북풍이 불었어. 가장 사랑스런 바람은, 불과 같은 기운으로 행운을 기약했다네. 어서 가서 보르도의 정원에 인사하렴. 오솔길 뻗던 고향,..
Sound 0031/ 1984 무거운 면을 뒤집으면, 가벼운 것. 같지만 서로 다른 얼굴. 긁적였던 메모가 있고 낙서, 푸념 등이 기록된 지면이 있다. 누구나 썼고 누구라도 버릴 수 있었던 것. 그곳엔 소고가 있다. 웃음과 울음 그리고 사색이 있다. 내가 너 되고 네가 나 되는 곳. 주체 객체의 구분보다 우리가 있다. 이면지는 평가받지 않을 자유가 있으며 힘 있는 관용도 있다. 더러운 권위가 결박되고, 조야한 희망이 솟아나는 곳. 비겁한 자. 힘이 없으면 글도 쓸 수 없어. 그러니 연약한 것을, 춤으로 가려놓지 마. 그가 나를 칭하길, 이면지라 했다. 뒤집어 놓으면 가벼운 것. 너, 그리고 나.
Sound 0030/ 1984 어둡고 밝은 면, 전차 객사에 명암이 떨어졌다. 채광 좋던 정오의 어느 날, 간밤 불쾌한 꿈을 떠올렸으나, 눈부신 햇살에 암울한 몽환은 사라졌다. 나는 고백했다. 세계는 밝고 맑다. 지키고 보호할 가치가 있다. 그곳에 깃든 저열한 어둠은 몰아내자. 결박시키자. 해맑은 소녀가, 객사 어느 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새하얀 편지지를 긁적였다. 벗에게 띄우는 편지거나, 연인에게 부치려는 편지리라. 미소는 깃들었고, 흰색 프릴의 상의는 한들거렸다. 소녀는 예뻤다. 눈부셨다. 햇살 양 볼이 단아해, 천사의 향기를 머금은 얼굴은 또한 반짝였다. 나는 선로 어귀에 멈추어 서서는, 소녀의 전신을 머리부터 발끝 까지 찬찬히 더듬었다. ‘아름다운 것, 그것은 소유다. 나만의 것, 가지고 싶어.’..
Sound 0029/ 1984 없었다. 사전을 들고 뒤척여 봐도, 글자 외엔 없었다. ‘나’는 무엇일까? 나의 ‘사랑’이란 또 무엇일까? 내 사랑의 ‘자유’란 그래서 무엇일까? 없었다. 선생은 체벌했다. 정답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했다. 암기해야했지만, ‘외우지 않아 벌 받아야 해’하고 나무랐다. 어떤 의미로 온당했다.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손바닥을 되도록 편편하게 벌리고 선생을 올려다봤다. 금색 안경이 빛났다. 온화한 위엄이, 황금빛으로 뜨겁게 발산되는 것 같았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 한 땀 한 땀에는, 그 속에 품은 천사의 분노가, 빙벽처럼 차갑게 솟구쳐 있는 것만 같았다. 양손 용기백배가 가득 차 있어도, 어쩐지 권위 앞에서의 두려움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본성이 틀렸다. 어비어미 없이, 가..
Sound 0028/ 1984 연약한 것, 힘없는 것, 자그맣고 옹골차게 귀여운 것. 그것은 강인한 것이 지켜줘야 할 세계의 나약이다. 아니다. 나약한 것은 없다. 연약한 것도 없고 조야한 것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위기의 순간, 단단해 진다. 강하게 변모해 스스로의 성벽을 쌓는다. 그것이 나약의 본래다. 또한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이다. 이기다. 그러니 구분치 말라. 연하다 자책치 말고, 강하다 호언치 말라. 분별은 허세다. 오만은 껍데기며 빈민의 담배다. 세인의 세계는, 기실 이기적인 총체로 단단한 군집을 이뤄왔었다. 그렇게 발현해 왔다. 날 선 단도의 그대여. 그대는 당신의 연약한 부분, 남몰래 은밀한 부위에 새빨간 예봉을 숨긴 채 살아왔었다. 그러나 세계가 끝나는 마지막, 당신은 구분 지었던 ..
Sound 0027/ 1984 죽였다. 나를 죽였다. 세계는 무지개처럼 화려해지다 어두워졌다. 흑암이 천지를 덮었다. 나는 사라졌다. 존재하지 않는 나로서, 세계는 존재해 있을까? 나 아닌 다른 것으로 존재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즉자 없는 반쪽 세계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혼란스럽다. 명명의 궁리를 사후에도 하다니, 나는 죽어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사색으로 빠져들면, 나는 어느새 부활해 있었다. 사과나무 아래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재차 나를 살해해, 나는 죽음 아닌 죽음으로 되돌렸다. 무한히 반복되는 생사의 대립, 끝없는 다툼. 너는 카인의 자손이다. 나는 눈을 번뜩였다. 꿈이었다. 악몽이었다. 반복되는 자살. 그리고 부활. 나는 상체를 일으켜 거친 숨을 내몰았다. 전신은..
Sound 0026/ 1984 그날이 그랬다. 나비가 날고 있었다. 노랗다. 태양과 닮아서 손을 뻗었다. 사뿐히 엄지손에 앉다가는, 하늘로 사라졌다. 예쁘다. 태양은 어디에나 있구나. 짧은 조우가 아쉬워, 나는 고개 떨쳐 상심했다. 그러다 거의 동시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커다란 군무가, 내발아래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었다. 계단을 오르고, 서로를 밟아 이전투구 하고 있었다. 남보다 조금 더 진일보하기 위해, 포석과 지점 차지로 여념 없는 중이었다. 비명이 들렸다. 때로 선혈이 솟았다. 사태를 인지 한 난, 황급히 고개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현실을 직시했다. 나도 계단 어디를 오르고 있구나. 순간, 노쇠한 절름발이가 등 뒤를 찔렀다. 날선 예봉이 느껴졌다. "그렇게 기어오르더니,..
Sound 0025/ 1984 나는 왜 나타났는가? 생각은 입자고 그것은 파동 성질을 갖는다. 파동은 벽을 통과하므로, 생각은 벽을 통과했다. 사색의 바운더리 이내에, 나는 몰랐다. 그것이 나를 규정했는지, 내가 그것을 규정했는지. 다만 세인의 걸음걸이로 걸었고, 그렇게 바운더리 이내를 걸어왔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이 입자의 파동이 가진 속성처럼, 나는 예고된 기우도 없이 바운더리의 가장자리에 몸을 부닥쳤다. 뜨악한 기분을 느끼고, 일순간만 지나면 평온했던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전날보다 빈번해졌고, 그 전날보다 다시 빈번해졌다. 확률적으로, 나는 사색의 바운더리 바깥에 존재하게 됐던 것이다. 내가 괴로운 것은, 다른 한 면에선 세인의 군집 바운더리 속에 속해 있기도 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