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Visual researchs/Design aesthetics (9)
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첫 번째 발견. "대중은 더 이상 갤러리에 집중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자신의 세계관을 작품 속에 은닉시킨다. 그리고 대중에게 발견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만약 모든 예술가가 은닉과 발견이라는 래퍼토리를 장치키셨다면, 대중은 갤러리 문턱에서부터 피로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은닉과 발견 관계 가운데 새롭다는 충격, 그리고 체현과 선언이라는 세 요소는, 대중의 피로감을 불식시키는데 좋은 조건이 된다. 그러한 충분한 조건들은, 한 명의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들과 차별화가 될 수 있는 지표로 작용을 하기 때문에, 대중은 보다 진정한 작가에게 자신의 집중을 내맡길 각오가 되어 있기는 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대중은, 예술가들이 장치한 모놀로그의 언어에 대하여 과거보다 선호하지는 않는 편이다. 껍데기가..
보편지각과 개별지각의 결합, 아이콘- 보편지각(common perception)과 개별지각(individual perception)의 결합, 아이콘 발신자는 수신자에게 대상을 지시한다. 지시받는 대상은, 사물의 보편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형태와 의미의 관계 맺기를 통한 사물의 지시작용이다. 만약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잘못된 관계 맺기를 하거나 보편 범주를 벗어난 지칭으로 표현할 경우, 정상적 커뮤니케이션은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탁자 위에 토끼가 앉아 있다. 발신자는 그것을 보고, “탁자 위에 도끼가 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아이들에게 만지라고 말할 것이다.”하고 말을 하게 된다면, 수신자들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손사래를 치게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음 실수를 통한 발신자-수신자 사이..
보편지각에서 개별지각으로 - 보편지각(common perception)에서 개별지각(individual perception)으로 보편지각은 선험적이지만 개별지각은 후험적이다. 후험적인 것은 주체의 경험에 편향되어 있다. 그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상식적이지도 않다. 개별지각은 주체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옥수수를 보고 북한의 미사일을 떠올리고 있었다면, 그것은 주체가 대상을 해석했던 후험적인 경험을 통해서였을 뿐이다. 북한의 미사일과 옥수수는 공사적인 인과관계에 놓여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미사일이 옥수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인식 주체의 통사적인 해석관계를 통해서다. 통속성은 개별적이며 후험적이다.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공속성과는 다르다. 가령 담..
보편지각과 개별지각- 보편지각의 '원형(prototype)'을 찾아서 이런 가정을 해 보자. 인류는 화살표라는 기호를 모른다. 그런 인류가, 화살표라는 기호를 처음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화살표가 방향을 지시하는 기호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혹은 삼각형과 닮은 화살촉의 모양이, 무엇을 베거나 찌를 때 보다 효과적인 모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인류 최초의 문명지대가 서로 만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다하더라도, 그들은 손가락을 이용해 방향을 지시하거나, 예리한 삼각형을 만들어 화살촉이나 칼의 모양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문명은, 별을 보고 점을 치거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 등을 공통적으로 사유했을 것이다. 일정한 공동체가 유지되는 인류에게는, '보편지각(commo..
왜 디자인 시대인가? "트럭 운전사는 고속도로 위에 있을 때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은선처를 가질 수는 없다. 일하는 여성은 방적 공장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거주하기 위한 장소를 그곳에 마련할 수는 없다. 우수한 기술자는 발전소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거주할 수 없다. [중략] 거주를 위한 건축물들은 사실상 어떠한 은신처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의 집들은 단지 계획되고 쉽게 유지하고 상대적으로 값싸며 빛, 공기, 태양에 열려 있으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러한 집들 자체는 어떠한 거주하기를 생산할 수 있는 조금의 확신도 주지 못한다." (Heidegger, , 1971, P. 145~146) 일절.오늘날의 우리는, 먹는 것과 입는..
사이버 세계의 유사와 상사 모든 것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양성성이다. 두 번째는 중성성이다. 세 번째는 음성성이다.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이항의 대립을 이룬다. 그 가운데 중성의 세계는 첫 번째도 세 번째도 아닌 둘 다를 나타낸다. 근대의 시대는 양성과 음성이 대립되던 시대로서, 존재에 대한 입장의 표명을 두 가지 가운데 하나로서 규착되도록 촉구시켰다. 따라서 모든 시대에 걸쳐 그와 같은 입장은 갈등을 일으켰고 전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정의는 두 세계 가운데 어딘가로 속해있어야 했으며, 각자의 진영은 서로의 독사(doxa)가 진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대에 들어서는 중간의 시대가 보다 중요해졌다. 중간은 첫 번째도 될 수 있고 세 번째고 될 수 있는 것으로서 가능성을 나타냈다...
기존 모바일의 다양한 형태성은 스마트폰의 보편적 형상에 이르러 그 변형성의 발전을 멈추게 되었다. 그 형태는, 일차적으로는 기술보편화를 통해 가능해졌고, 이차적으로는 구매자들의 소비보편화를 통해 가능해졌다. 이러한 양상은 형태 있음의 없음을 드러내주는 것이 되었으며, 형상의 표피에서 의미의 내포라는 것으로 전환될 수 있는 방향의 제시가 될 수도 있었다. 표피를 통해 내면을 바라보겠다는 의도는, 근본적으로 ‘눈을 통해 눈 너머의 것을 바라보는 피안의 열망’과 닮았다. 그러한 열망은 형상(모바일 폰이라는 기계적 하드웨어)의 단조로움으로 집적되는 외배엽(ectoderm)에서, 내실(폰이 가지는 기능적 콘텐츠)의 복잡함으로 집적되는 내배엽(endoderm)으로의 이행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가운데 ..
오늘날의 미술은 새로움을 선언해야만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모방을 무시하는 재현은 단토의 질문과 선언에 의해 미술의 설자리를 좁게 만들었다. 미술은 이미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철학의 영역에까지 그 발을 들어 놓았다. 미술은 새로움이다. 새로움은 곧 선언에 대한 것이며, 그 자체가 전위성을 내포하고 있다. 진부한 선언은 사멸되고 철학의 영역 바깥으로 송환된 후 근대적 범주에 묶여 그 힘을 잃게 만들어버린다. 오늘날의 미술은 따라서 그 스스로가 다른 것을 앞서가는 진보적 발전을 내포하고 있으며 전위적 상징을 기본적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뒤샹의 ‘변기’와 워홀의 ‘브릴로박스’는 침묵이 강요된 미술에 있어 불편한 논제가 되었다. 그러나 자극적인 질문은 침묵의 금언을 종식시켰고, 결과적으로는..
Preface 'Alice's para-doxa' 루이스 캐럴의「이상한 나라의 엘리스」2장, ‘눈물연못(The pool of tears)’ 부분에는 탁자 밑에 놓인 케이크를 먹은 엘리스가, 갑작스럽게 자라나는 장면이 나온다. 케이크를 먹은 엘리스는 전보다 커졌고, 이후보다 작아졌다. 엘리스는 커진 것인가 작아진 것인가? 들뢰즈는「의미의 논리」에서, 현재를 피해가는 한에서 생성은 이전과 이후, 과거와 미래의 일정한 분리와 구분도 용인하지 않는다고 했다. 엘리스는 작아지지 않고는 커지지 않으며, 커지지 않고는 작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커지는 것과 작아지는 것은 동시적이며, 그 고유한 점은 현재를 비켜 가는데(esquiver) 있다고 했다. 즉 엘리스는 자라지 않고는 줄어들지 않으며, 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