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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researchs/Design aesthetics

오늘날의 미술

스티붕이 2012. 5. 30. 14:24


오늘날의 미술은 새로움을 선언해야만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모방을 무시하는 재현은 단토의 질문과 선언에 의해 미술의 설자리를 좁게 만들었다. 미술은 이미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철학의 영역에까지 그 발을 들어 놓았다.


미술은 새로움이다. 새로움은 곧 선언에 대한 것이며, 그 자체가 전위성을 내포하고 있다. 진부한 선언은 사멸되고 철학의 영역 바깥으로 송환된 후 근대적 범주에 묶여 그 힘을 잃게 만들어버린다. 오늘날의 미술은 따라서 그 스스로가 다른 것을 앞서가는 진보적 발전을 내포하고 있으며 전위적 상징을 기본적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뒤샹의 ‘변기’와 워홀의 ‘브릴로박스’는 침묵이 강요된 미술에 있어 불편한 논제가 되었다. 그러나 자극적인 질문은 침묵의 금언을 종식시켰고, 결과적으로는 미술을 철학의 영역에까지 이끌 수 있는 넛지가 되기도 했다. 철학에 있어서의 미술은, 첫째는 새로움에 관한 갈망의 반영이었고 둘째는 스스로의 전위성을 통한 변용이었다. 시대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이행’을 위해 미술을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으며, 그러한 추구는 미술을 척벽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었다. 워홀의 브릴로박스가 예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움에 대한 충격과 선언, 그리고 체현을 통한 격정적인 작업의 반복을 통해서였으며, 평론가들은 그 지점을 현대미술의 재현성으로부터의 독립으로 해석해 갔던 것이다. 오늘날의 미술이 남기는 것은, 이제는 비-재현성의 문제와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철학의 영도(롤랑바르트에 따르자면 'degree zero')로서만 존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현의 부정과 보이지 않는 것의 추구라는 모호한 규정은 당대는 물론 오늘날의 대중까지 해석불능 상태로 만들어놓았다. 보편적 해석의 어려움은 대중을 미술작품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고(심리적 거리) 텅 빈 캔버스(예를 들어 프랭크 스텔라의 작품)와 같은 전위적 작품들은 그들로부터 소외되게(물리적 거리) 만들어놓기도 했다. “미술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은 작가와 평론가, 그리고 대중의 사이를 오가며 서로의 간극을 보다 멀어지게 만들었고, 급기야는 예술이해의 무지(이른바 예술적 아비투스)라는 냉대로 화단과 다중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구별시켜놓기도 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간 미술은, 따라서 철학의 역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유리될 수밖에 없었다. 또 소수의 각성된 자들, 이를테면 사상가와 지식인들의 기호(마르쿠제도 주장하는)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의 미술이 선언하는(예술적 프로파간다) 대상은 근본적으로는 다수가 아닌 소수의 실체적인 식자층에 관한 선언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러한 양상의 예술은 식자나 평론가 등의 취향에 힘입어 대중매체로 확산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한 대중매체로서의 조망은, 현대미술이 사회의 다중을 각성과 참여라는 것으로 작동될 수 매개가 되는가하면, 새로움의 충격을 통한 사회 구조적 범주의 너비로서 확장될 수 있는 기능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속성은 현대의 미술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언어가 되기도 했으며, 또 다른 가능성으로서의 개념으로 작동되는 인자가 되기도 했다.


오늘날의 미술은 그와 같은 일련의 지루한 과정을 통해 작가의 예술적 진정성을 재확인하며, 검증된 작가들을 부양시켜나갔다. 그것은 ‘누구나’ 생세계(lifeworld, as lived)의 일상적인 사물을 손쉽게 변용(예술적으로)시킬 수 있다는 과거의 선언에 관한 대비며 양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기재가 되어주었다. 사진술의 발달이후, 미술은 그 스스로가 그렇게 되기를 자인했으며, 평범한 모사의 세계를 벗어나 부러 은닉의 ‘세계(하이데거에 따르자면 작가의 철학적 세계)’로 떠나갔다. 그리고는 새로운 부산물들을 ‘대지(세계의 반대되는)’ 위에 퍼 올리기 위해 횃불과 곡괭이를 들고 보다 더 깊은 동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결국 인식 표현이라는 작가의 부산물은, 한 작가의 진솔한 세계관에 의해 권리 지어졌으며, 그러한 세계관은 작품 개념의 정교함을 통해 일련의 평가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미술이 가지는 새로움은 인간의 지적탐구에 관한 소산이며 호기심으로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탐구의 열망은, 인간의 예술을 철학의 영역에까지 발을 들여놓게 만든 기재로 작용했다. 기성의 텍스트로 번복을 이뤘던 철학의 세계는, 일정한 성장을 기점으로 현시의 표현에 깊은 반영을 오랫동안 바랐다. 그 와중 이미지 언어로서의 미술은 철학 사유의 얼굴로 기능해 카라바조주의(caravaggism)로 발현될 수 있는 표정이 될 수 있었다. 이 같은 관계는 본디 인류의 변증적 발전 과정 가운데 하나였으며, 진리를 추구하려는 우리의 모습으로서 가능했다. 따라서 오늘날의 미술은 그 같은 의지의 흔적이며 시대의 증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미술은 철학의 영도에 다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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