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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researchs/Design aesthetics

왜 디자인 시대인가?

스티붕이 2014. 2. 15. 13:38


왜 디자인 시대인가?


"트럭 운전사는 고속도로 위에 있을 때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은선처를 가질 수는 없다. 일하는 여성은 방적 공장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거주하기 위한 장소를 그곳에 마련할 수는 없다. 우수한 기술자는 발전소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거주할 수 없다. [중략] 거주를 위한 건축물들은 사실상 어떠한 은신처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의 집들은 단지 계획되고 쉽게 유지하고 상대적으로 값싸며 빛, 공기, 태양에 열려 있으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러한 집들 자체는 어떠한 거주하기를 생산할 수 있는 조금의 확신도 주지 못한다." (Heidegger, <The Origin of the Work of Art>, 1971, P. 145~146)

 

일절.

오늘날의 우리는,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거주하는 것이 해결됐다. 우리는 그 이상을 원한다.

 

이절.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 결핍된 시절, 우리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앞을 향해 달렸다. '의식주'에 대한 해결은 대다수 사람들의 기본적인 추구였다. 그러한 추구는 하나의 목표를 만들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적의 달성이라는 원칙 아래 하나로 모였다.

 

삼절.

그 단계는 목적이 수단에 우선되는 시대정신을 형성했다. 도덕과 윤리, 환경보전 등의 가치는 목적 달성이라는 원칙 아래 손쉽게 훼손될 수 있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욕구는, 물질욕망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보여지는(남성적) 기술력의 발견과 기술발전으로 집약되고 있었다. 그런 집약은 사회라는 틀 안에서 틀 속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내파(implosion)를 지향했다.

 

사절.

어느정도 의식주가 해결된 이후, 다중은 또 다른 가치를 원했다.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다, 또는 이러한 추구는 옳바른 방향이 아니었던 것 같다, 부의 배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러가지 의견 그리고 의구심(목적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북해 하는, 나는 언제나 그렇게 'stance' 있을 것이라는 일방적 관점) 등이 하나의 원칙 속에서 심하게 흔들렸다. 시대정신은 거대한 방향을 놓치기 시작했다. 다중은 목적을 잃은 시대정신을 이탈하여 각자의 세계관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나의 원칙, 하나의 목적은 개별화된 다수의 원칙을 수용하지 못했다. 하나가 부서지는 것, 그것은 오늘날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오절.

흩어진 사람들은, 개인의 삶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틀 안을 지향했던 하나의 원칙 아래 살던 과거를 반성했다. 내파의 추구는 어떤 것도 보상해 주지 않았다. 혹은 틀 속에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 의심은 확산되었고, 개인에 대한 집중은 보다 강해졌다. 그것은 정서가 되었으며, 정서는 개별적 감성이라는 것으로 새로운 문화적 지형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목적 잃은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이해받기를 원했다. 즉 차가운 시대에서 따뜻한 시대로, 여성적 포용력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육절.

목적의 추구보다는 인간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인간을 향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 있는가? 서비스(나는 지금 그것으로 'stance' 있다는 것을 이해받는 것)가 있다. 그리고 디자인이 있다. 서비스(디자인 자체가 하나의 서비스)와 디자인 등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방법이며 분야다. 사람을 향하는 '서비스 디자인'은 시대정신의 발견에 따라 이전 시대의 변두리(간접적인 장식)에서 주류(직접적인 참여)로 급속하게 부상했다. 오늘날의 디자인은 외파(explosion)의 충격을 통하여, 기존 UI(User Interface)환경에서 UX(User Experience)환경으로 그 무게 중심이 이동을 했다.


칠절.

디자인은 사용자를 추구한다. 사용자는 그것을 활용할 사람이다. 거꾸로 표현을 하면, 디자인에 대한 이해란 곧바로 사람에 대한 이해와 같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디자이너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디자이너 자신에 대한 이해 역시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디자이너 스스로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 역시 명확하게 정립되어야만 타자를 향할 수 있다는 역설을 방증해 낸다. 디자인은, 충분하지 않은 것을 '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충분하지 않은 것을 원한다는 것은, 결핍에 대한 인정이며 그것에 대한 추구라는 것으로 축약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시대가 원하는 디자인에 대한 욕구는,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거주하는 것 이상의 것(이해받고 싶어하는 파편화된 다중의 요청, 디자이너 스스로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 등)에 대한 추구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한 추구는, '디자인 시대'라는 표현으로 우리 주변에 재현(representation)되어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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