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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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지각에서 개별지각으로
- 보편지각(common perception)에서 개별지각(individual perception)으로
보편지각은 선험적이지만 개별지각은 후험적이다. 후험적인 것은 주체의 경험에 편향되어 있다. 그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상식적이지도 않다. 개별지각은 주체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옥수수를 보고 북한의 미사일을 떠올리고 있었다면, 그것은 주체가 대상을 해석했던 후험적인 경험을 통해서였을 뿐이다. 북한의 미사일과 옥수수는 공사적인 인과관계에 놓여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미사일이 옥수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인식 주체의 통사적인 해석관계를 통해서다. 통속성은 개별적이며 후험적이다.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공속성과는 다르다. 가령 담배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담배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고 주장하는 마그리트(Rene Magritte)의 주장은 공사적이지 않다. 그리고 집단으로서의 군중을 소수로서의 군상으로 그려놓은 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depaysement) 작품 <골콘다 Golconde> 역시 공사적이지 않다. 또 로트레아몽(Comte de Lautreamont)의 글 <말도르르의 노래(chants of maldoror)> 중, "여신과 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아름답다."는 표현 또한 공사적이지 않다. 그들은 통사적이며 나아가서는 시적(poetic)이기까지 하다.
인식의 주체는 사물을 다각도로 경험한다. 그러한 경험은 보편적으로 적시될 수 있으면서도, 공리적으로 적시될 수 없다. 이 말은, 경험의 거시적(macro) 분류와 분석은 가능하면서, 미시적(micro) 분류와 분석이 불가능함을 의미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늘이 밝은 것을 낮'으로 분류하여 정의할 수 있고, '하늘이 깜깜 한 것을 밤'으로 분류하여 정의할 수는 있지만, 하늘의 어느지점 부터가 낮이며 밤인지는 산술적인 공리로 정박시키기 어렵다. 하늘에는 새벽이 있고 석양이 있으며, 어둡지만 밝은 창공도 있는 법이다. 보편타당한 기준이란 언제나 거시적 관점을 통해서다. 미시적인 관점은, 결과적으로 개인의 해석 판단에 의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주체의 개별적 선언'을 통하여 증언 가능하다. 통사적인 해석의 관계는, 따라서 현상을 설명하는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현상을 이해해야하는 인문과학(humanities)의 세계다. 그러므로 주체는, 대상을 해석해야하는 보편지각의 관습(custom)과는 상관없이,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다.'는 개별지각의 해석이 보다 중요해지게 되는 것이다.
해석은 이해를 만든다. 이해는 사유를 일으키고 사유는 의지를 구동시킨다. 그 의지는, 결국은 설득(lexis)이라는 행위(praxis)를 유발시켜 주체-몸을 운동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설득의 행동은, 주체-몸이 활용하는 플랫폼의 선택을 통하여 시나 소설과 같은 텍스트(시각적 글)의 플랫폼으로, 춤과 풍경화 같은 이미지(시각적 그림)의 플랫폼으로, 대중음악과 언어와 같은 사운드(청각적 소리)의 플랫폼 등으로 전달되게 되는 것이다. 설득을 위한 주체의 플랫폼은, 따라서 수신자-발신자의 인과관계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소통의 기본법칙을 이루어내게 된다. 인간이란 '어떤 것에 대하여 그렇게 느껴졌다.'는 후험적인 경험의 해석으로 인하여, 인간 존재에 관한 본질적인 표현성(mimesis)을, 경험-사유-해석-설득의 네 가지 과정을 통하여 관여(關與, methexis)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무이한 자연의 매개종이 된다. 만약 그것이 단절된 인간이 있다면, 그는 '일차원적 인간(One-Dimensional Man)'과 '익명의 인간(das-Man)'이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