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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researchs/Design aesthetics

앞으로의 예술가, 앞으로의 디자이너

스티붕이 2014. 4. 13. 18:51


첫 번째 발견"대중은 더 이상 갤러리에 집중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자신의 세계관을 작품 속에 은닉시킨다. 그리고 대중에게 발견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만약 모든 예술가가 은닉과 발견이라는 래퍼토리를 장치키셨다면, 대중은 갤러리 문턱에서부터 피로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은닉과 발견 관계 가운데 새롭다는 충격, 그리고 체현과 선언이라는 세 요소는, 대중의 피로감을 불식시키는데 좋은 조건이 된다. 그러한 충분한 조건들은, 한 명의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들과 차별화가 될 수 있는 지표로 작용을 하기 때문에, 대중은 보다 진정한 작가에게 자신의 집중을 내맡길 각오가 되어 있기는 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대중은, 예술가들이 장치한 모놀로그의 언어에 대하여 과거보다 선호하지는 않는 편이다. 껍데기가 많거나, 사적 언어 자체에 새로움이 없다고 판단을 내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발견"디자인은 예술의 길로 들어섰다."


디자인과 예술의 관계는 인과율적이다. 따라서 머지않은 시기에 디자인도 예술의 길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과거의 예술은 장식적이었다. 그것은 공간을 꾸미거나 냉염한 장소에 온기를 불어넣고, 사람이나 풍경 등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사진기술의 발전 등으로 인해, 예술은 철학의 영역으로 사라졌다.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간 예술은, 기존의 공적 언어를 은닉시키고, 사적 언어를 풍성하게 만들어 장식적인 기능을 상당부분 축소시켰다. 그 틈을 매운 것은 디자인이었다. 디자인은 도안과 의장기술 등의 다양한 기능성으로 무장을 하여 시장 이곳저곳으로 발 빠르게 번져나갔다. 가볍거나, 혹은 다양하거나, 나아가서는 사용자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다품종 대량생산의 기능성을 충실히 다져나갔던 것이다. 만약 디자인과 예술이 하나의 몸체처럼 인과율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면, 또 다른 내외부적 요인들로 인하여 디자인 역시 예술의 길을 따라가고 말 것이다. 그런 시점이 온다면, 디자인 역시 철학의 영도 즉 영역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세 번째 발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모놀로그는 사라졌다. 남는 것은 다이얼로그다. 다이얼로그가 판이한 시대, 또 다시 공적 언어를 대안으로 떠올리는 것은 어떤 면에서 사치스럽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을 해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이얼로그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예컨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한계에 대하여, 권력의 무능함에 대하여, 나아가서는 가진 자들의 횡포와 독점적 폭거 등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회피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오늘날의 예술가들의 과거보다 웅얼거리는 사변적 작품 세계에만 취중하고 있는 것은, 따지고 보면 불편한 것에 대하여 피하고 싶었던 것만은 아닌지? 예술이란 언제나 새로움이고 언제나 체현이고 언제나 선언이다. 그렇지 않은 예술은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은 장식적 작품일 뿐이다. 영령과 개념 나아가서는 사회를 관조하는 세계관까지 깃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예술가 그리고 디자이너들이 가져야할 앙가주망적인 스탠스다. 그런 것이 부족한 시대, 시대정신은 예술가들에게 프레임 너머의 것을 지칭해 줄 역할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모놀로그의 종결이자 다이얼로그의 부활로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과 디자인의 역할이란, 언제나 소통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음으로 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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