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터널 이펙트와 나 본문

Essays/Sound of city

터널 이펙트와 나

스티붕이 2012. 7. 20. 12:52

Sound 0025/ 1984


나는 왜 나타났는가? 생각은 입자고 그것은 파동 성질을 갖는다. 파동은 벽을 통과하므로, 생각은 벽을 통과했다. 사색의 바운더리 이내에, 나는 몰랐다. 그것이 나를 규정했는지, 내가 그것을 규정했는지. 다만 세인의 걸음걸이로 걸었고, 그렇게 바운더리 이내를 걸어왔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이 입자의 파동이 가진 속성처럼, 나는 예고된 기우도 없이 바운더리의 가장자리에 몸을 부닥쳤다. 뜨악한 기분을 느끼고, 일순간만 지나면 평온했던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전날보다 빈번해졌고, 그 전날보다 다시 빈번해졌다. 확률적으로, 나는 사색의 바운더리 바깥에 존재하게 됐던 것이다.

내가 괴로운 것은, 다른 한 면에선 세인의 군집 바운더리 속에 속해 있기도 했기 때문인데,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나, 어느 시점에서는 한 가지 영역의 존재에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이 들 때의 양비한 존재적 괴리감 때문이었다. 나는 나에 대해 존재를 규명할 수 없었다. 여느 직장인처럼 회사를 가고, 그렇게 거리를 걷는다 생각하고 싶었다. 돈을 벌어 쓰면, 그렇게 행복한 일상이 찾아오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돈을 벌었다. 더 나은 집을 사고, 더 나은 차를 사기 위해서였다. 행복은 광고 전단지 속에 있었다. 활짝 웃는 모델, 그리고 넘치는 물건, 주위에 가득 핀 여유. 그것은 직장인이 꿈꾸는 광고 속 자신의 투영이었던 셈이다. 누구나 그랬다. 그래야만 했고, 그것이 돈 버는 이유에 대한 가장 좋은 기폭제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어느 순간부터 잘 알게 됐다. 알고 싶지 않을 만큼, 나는 자세히 알게 됐다. 내게는 행복이 없었다. 저주가 있었다. 무색한 저주. 아무런 욕심 없는, 배금주의가 판을 칠 수 없는 저주. 돈을 벌 필요도 없다고 생각됐고,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보다도 없어보였다. 나는 지루했고, 한 편으로 니힐리스트가 돼야 했다.


그것이 내 존재이유여야 했을까? 왜 다른 이에게는 그런 사색의 바운더리에 닿는 사건은 일어나기 않는 걸까? 나는 고민했다. 알기위해 노력했다. 지인들을 찾아가 물었고, 때로 가상의 신께 조아려 그 물음을 되풀이도 해봤다. 허사였다. 지인은 코웃음 쳤다. 배부른 소리라 했다. 신은, 이미 그의 존재 자체로서 의문을 품었기에, 머리만 맴도는 허상의 대답만 되돌아왔다. 존재이유는 어느 곳에서도 알 수 없었다.


터널 이펙트가 있다. 두 가지 쿼크가 반동을 해, 불확정한 시기에 반동 지점의 바깥에 존재하는 특이한 쿼크. 그것의 그런 식으로 일련의 지점 바깥에 존재하는 이유는 없다. 신의 계획인지, 또는 당위적 필연의 알고리즘 인지. 입자가 파동의 속성을 가지는 순간, 쿼크는 자신의 위치에너지보다 높은 곳에 그 속성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내가 그런 걸까? 군중의 어느 누구라도, 또는 불확정적으로 사회에 고착된 바운더리를 넘게 되는 걸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나는 비 자의적으로 선택된 암울한 개인의 희생물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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