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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Sound 0004/ 1984 제비가 말했다. 잠을 자는 것은 죽은 것이다. 나는 제비의 말을 일축했다. 잠을 자는 것은 생의 연장입니다. 제비가 고개를 흔들었다. 게으른 자, 잠을 찬양하는 넌 도대체 어떤 것을 얻으려 그렇게 대답하는가? 제비가 다그치듯 소리쳤다. 나는, 제 생의 다른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다른 생? 제비가 내 귀로 다가와 말했다. 그리고는, 네 삶의 다른 것이라면 현세의 어눌함과 진배없겠지, 껄껄껄 하고 웃으며 말했다. 비웃음이었다. 그는 현실의 내 삶에 대한 지독한 패배의식을 심어주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당연한 행동이었다. 네가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 나를 설득시키려 하지 말고 네 증거를 나에게 보여 다오. 제비가 쏘아보듯 물었다.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
Sound 0003/ 1984 글을 쓴다는 것은 내게 있어 좋은 것이었다. 나는 소년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늙었네. 자네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하네. 여자는 웃었다. 그냥 웃었다. 아저씨는 왜 웃는 것이 그냥 웃는 것이라 생각했나요, 소년이 물었다. 나는 소년에게 말했다. 여자는 그냥 웃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여자가 웃었다는 것은 여자가 그냥 웃었다 로 얘기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소년에게 또 말했다. 진실을 이야기 하기란 어렵지 않단다. 여자는 웃었다. 나는 여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당신은 그냥 웃되, 왜 웃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를 말해주시죠. 여자는 말이 없었다. 난간을 붙잡고, 열쇠를 채우고 있었다. 이 열쇠에는, 사랑하는 자들의..
Sound 0002/ 1984 거지가 한 푼 달라고 했다. 선생님, 한 푼 도와주시지요, 했다. 양손을 내밀었다. 거지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비어있는 손바닥 아래에, 칼을 숨겨두었을 것이다 상상했다. 나는 기묘한 공포를 느꼈다. 인적이 없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갈 길이 바빠서요, 하고 걸을 걸음을 재촉했다. 바쁜 사람 인 냥 시계도 올려다보았다. 그런 척 했다. 거지가 앞길을 막아섰다. 선생님 한 푼 만요, 하고 옷깃을 붙잡았다. 한 푼 도와주시지요. 거지 눈빛이 살기로 등등하여, 나는 두 번째 칼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자니 심장이 뛰었다. 밤은 깊어 자정이 눈앞이었다. 던져줄 푼돈이라곤 백 원이 없다, 내게는 사실이었다. 거지에게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얼마치의 구걸 푼돈이 있을 작자라 기대했을 ..
기존 모바일의 다양한 형태성은 스마트폰의 보편적 형상에 이르러 그 변형성의 발전을 멈추게 되었다. 그 형태는, 일차적으로는 기술보편화를 통해 가능해졌고, 이차적으로는 구매자들의 소비보편화를 통해 가능해졌다. 이러한 양상은 형태 있음의 없음을 드러내주는 것이 되었으며, 형상의 표피에서 의미의 내포라는 것으로 전환될 수 있는 방향의 제시가 될 수도 있었다. 표피를 통해 내면을 바라보겠다는 의도는, 근본적으로 ‘눈을 통해 눈 너머의 것을 바라보는 피안의 열망’과 닮았다. 그러한 열망은 형상(모바일 폰이라는 기계적 하드웨어)의 단조로움으로 집적되는 외배엽(ectoderm)에서, 내실(폰이 가지는 기능적 콘텐츠)의 복잡함으로 집적되는 내배엽(endoderm)으로의 이행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가운데 ..
3장. 행복 21. 우리의 목적은 돈이 아니에요. 미야모토 씨의 부인인 또 다른 미야모토 씨가 말했다. 비싸지 않은 대관료로 갤러리를 운영하고 싶을 뿐입니다. 남편의 어머니께서 먼저 제안했던 것이기도 하죠. 모든 행위에는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자연인과율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원인과 결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목적이 돈이 아닌 이유는 어떤 이유일 때 가능할까? 애써 돈을 거부함으로써 돈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을 때? 혼란스러웠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우리들의 목적은 돈이 아니에요. 22. 물론 비쌌다.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보자면, 그렇게 저렴한 대관료는 아니었다. 청담동과 같은 도쿄의 금싸라기 땅 위를 감안한다면, 더군다나 팔리는 작품을 애써 전시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의아한 ..
2장. 수행 11. 지진이 났다.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와 원전의 사고까지. 약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하고 8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실종됐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는 동일본 대지진에 대해 충격과 경악을 느꼈다. 세계의 구호물품이 전해졌고, 일본은 유례없는 에너지 절약과 단전 등을 실시했다. 그야말로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12. 동시에 다음 달 열릴 예정이었던 긴자에서의 전시가 걱정됐다. 동료 작가에 따르면, 일본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전시가 하나둘씩 취소되고 있다고 했다. 그 역시 내달 열리기로 예정됐던 그룹전을 전면 취소하기로 결정했다며 당부를 더했다. 걱정됐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첫 번째는 이 난중에 전시는 무슨 전시냐며 호들갑 떨어선 안 된다는 것. 두 번째는 후쿠시마 원전사태..
1장. 직관 1. 이것은 운명인가 보다. 짐을 쌌다. 자전거를 챙겼다. 도쿄로 떠났다. 2. 당도한 당일, 비는 추적추적, 미술관은 냉담했다. 한 마디로 문전박대를 당했다. 3. 모리미술관에서 바라보는 도쿄타워는 아름다웠다. 힘을 내기로 했다. 4. 갤러리가 운집한 긴자, 역시나 냉담한 반응. 그렇지만 직관을 믿어보기로 했다. 5. 서점으로 보이는 곳에 갤러리의 간판이, 지나치려다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입구를 두드렸다. 그럼에도 들려오는 대답은 죄송합니다. 그런데 왜 내면에서는 이곳이 전시를 할 곳이라는 믿음을 뿜어내고 있는 것일까? 6. 얼마동안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이곳은 갤러리가 맞지만 해외에서 열리는 갤러리 박람회를 위해 휴관하고 있다는 것. 되돌아가려하자 갤러리 오너가 붙잡는다. 잠깐만..
하늘이 장관이다. 짙은 노을 그리고 움직이는 구름들. 태양이 넘어가는 지점, 꽤 높은 건물 위로 구름이 걸려있다. 생성됐다 흩어지고 또 생성됐다 흩어지고는 했다. 서쪽 노을의 깊이는, 건물에 에둘린 구름도 반사시켜, 정말이지 장관 아닌 장관을 연출시키고 있었다. 나는 지음인들로 보이는 무리에서 벗어나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뒤늦게 운전석으로 들어왔다. 봉덕 초등학교 앞으로 가주세요. 기사는 계면스런 표정으로 차를 몰고는, 바로 앞 아마도 200여 미터 쯤 되는 거리 앞에서 차를 멈췄다. 다 왔습니다, 손님. 나는 서둘러 학교의 옥상을 향해 줄달음쳤다. 태양이 사라질까, 그리고 석양이 산산 됐을까 노심초사였기 때문이다. 학교 꼭대기에 위치한 스튜디오는, 또 다른 지인들로 보이는 몇몇이..
회사 일층 스타벅스로 갔다. 어수선하다. 둘러보니 공사 중이다. 나는 어떻게 들어온 것일까. 주문은 하지 않고 사람들을 관찰했다. 공사를 하거나, 매장을 정리하거나 했다. 한 점원이 지나갔다. 당신 왜 들어왔지, 하는 표정으로 심드렁 쏜다. 나는 평소표정과 마찬가지다.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 일체가, 나를 관찰하거나 쏘아보거나했다. 왼쪽 팔이 무척 간지러웠다. 오른손을 드는 순간, 잠에서 깼다. 사람들이 증발했다. 스타벅스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왼쪽 팔의 두드러기 뿐. 꿈의 흔적만 남은 것이다.
사람은 모순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저곳에 금성이 떠 있다. 아침에는 새벽별, 저녁에는 개밥바라기 또는 저녁별이다. 태양이 떠 있다. 새벽에는 일출 저녁에는 일몰이다. 하지만 금성은 하나로 존재했고, 태양은 유일무이 저곳에 떠 있었다. 인간의 관찰시점은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현존재를 기준으로 프레임 한다. 말은 몸을 떠나는 순간 명료함을 잃는다. 노이즈가 발생한다. 언어는 생각보다 논리적이지 않으며 해석체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수용된다. 몸으로부터 보다 멀리 떨어진 문자, 이미지 등은 그 자체로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 담배는 당신들이 아는 담배가 아니라는 마그리트의 선언, 발화는 같지만 의미가 조금 다른 데리다의 차연 등은 A는 곧 B여야 한다는 인간의 기재에 해체를 감행했다. 이것은 이런 방식이어야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