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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Sound 0014/ 1984 여자 얼굴은, 주전자처럼 부풀어 있었다. 화가 잔뜩 낀 얼굴엔 웃음이 없었고, 스산한 한기가 인두겁 위를 맴돌고 있었다. 나는 적갈색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이제 막 들어온 새침한 캐시미어코트의 그녀를,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툼한 회색 화장기 위엔 인조적 얼굴이 솟아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광포한 에너지가 여자에게서 독아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당황한 내심을 가리는 기척으로, 자리에 앉아봐 잠깐, 하고 퉁명스럽게 여자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반응도 없었다. 웃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닌 뻣뻣한 면상에, 마네킹처럼 단단한 표정으로 내 곁에 서 있을 뿐이었다. 죽어있지만, 살기위해 공기의 이슬을 빨아들인 주검..
Sound 0013/ 1984 괴롭다. 삶이란 외롭고, 또한 밝다 어두워진다. 조증이나 울증이나 감정 기복은 내면에 커, 심장 속 소동은 초간을 유지로, 매양 대칭점을 오간다. 술이 뭐고 밥이 뭐며, 백이 뭐고 억이 뭐냐. 겉보기 사람은 외양을 꾸며, 본연을 감추고 오늘도 술잔을 부탁 거린다. 외롭다. 겉을 만든 내가, 그것이 지긋지긋하게 싫어, 차양하고 몸을 감싸 홀연히 분쇄 되고 싶다. 노트 속이라던가, 어디 돌덩이 그림자 아래라도, 나는 겉껍질을 벗어나 고고히 사라지고 싶다. 누가 내 이름도 부를라 치면, 나는 돌연 표정을 바꾸고 연신 입 꼬리를 들쑤신다. 인식도 없고, 마치 달팽이의 촉수마냥, 웃음은 본연의 멀리, 표피를 작열 시킬 만큼 어느새 강대해져 버리고 만다. 한숨 돌리고 내면에 돌아오면,..
Sound 0012/ 1984 "나는, 순수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여자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탈리안 로스트를 한 모금 마셨다. 새까만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며, "다른 남자를 만나려고 그랬겠죠." 하고 말했다. 창안과 밖의 경계에 비친 그녀는 짧은 치마를 끌어당기며, "다른 남자를 만나려 순수해지지 않았다는 건가요?" 하고 물었다. "순수했던 과거는, 남자를 만나기 전이었습니다." 나는 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드립 커피의 수증기 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손님 몇몇이 카운터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이탈리안 로스트를 두어 모금 삼켰다. "한 잔 더 마실까요?" '또각, 또각'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바닥을 달궜다. 긴 생머리가 치마..
Sound 0011/ 1984 오늘도 그 자리에 앉았다. 상행 7-1. 건너 좌석, 한 광인이 앉아있다. 행색이 광인이고 자조(自嘲)가 광인이다. 여느 한 자처럼 그도 안하무인은 일반이다. 고성 지르고 공중에 공포를 내뿜는다. 이런 자는 국철에는 단골이라 승객은 그저 무덤하다. 딴청 하여 광인이 자신에게 피해주지 않기를 바라는 것에 만족한다. 무대 위 광인은 말하자면 빈 객석을 바라보고 있는 암울한 연기자다. 그가 안하무인 하니 관객은 철면피로 시위하는 셈이다. 나는 읽던 책_방법서설_을 덮고 눈을 감았다. 면면한 건물 건물이 반복되고 조용한 소음이 귀청을 채우면 국철의 오후 낮잠은 그저 꿀맛으로 대낮승객을 유혹한다. 그러다 얼마 후, 앞에 앉은 광인의 우렁찬 헛기침이 객차를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감았..
Sound 0010/ 1984 기차에 오르기 전, 나는 전장의 중앙에 서 있었다. 사면은 초가였다. 어느 면으로도 후퇴는 불가능해 보였다. 상사Z가 지천을 가로 막는다. 그가 내 게으름과 업무 무능을 꼬리 잡아 면전 위로 호통 치기 시작한다. 나는 그 지탄에 뜨악하여, 옹졸하게 움츠리는 척 했다.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는 연기. 그것은 미덕이다. 하급자가 상급자에 순응하는 직장관계의 고리로. 그런 암묵적 코드를 떠올리면, 상사Z의 아우라는 발목을 붙잡는다. 지탄의 진정성이 절반만 가지고 있더라도, 나로선 세습된 사내의 암묵적 코드에 지배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정도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사람 근원의 인격은 그 방축을 허물고 만다. 어느 지점에서, 직장업무가 개인 실존의 바로미터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지..
Sound 0009/ 1984 사람은 꿈을 꾼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죽어있다는 의미다. 또한 살아있기도 하고 죽어있기도 한 의미다. 꿈은 곧 신이다. 신은 살아있기도 하고 죽어있기도 하다. 신은 곧 꿈이다. 꿈은 죽어있기도 하고 살아있기도 하다. 또한 그 둘이다. 이것은 동시적이며 상대적인 속성이다. 현실과 가상의 모호한 경계다. 말하자면 붉은 대지와 파란 하늘의 수평선이다. 그 끝의 중간색상. 이원화된 양극 이전의 모호한 색깔이다. 붉다. 그러나 동시에 파란 이들의 색상은, 존재 이전의 존재로, 이원화되었던 존재들을 떠받친다. 나는 동시적이며 상대적인 속성을 통해 꿈과 신에 대한 기묘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은 꿈 스스로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과 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다..
Sound 0008/ 1984 꽃 피는 춘 사월. 그녀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녀는 죽었다. 아파트 난간에 매달려 있던 그녀는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던 순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그저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는 옆집 꼬맹이에게 발견되는 순간, 난간에 매달려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아름답다 생각했던 순간, 한 낮 태양이 노란 색도 빨간 색도 아니라고 깨달았던 순간, 죽기 다짐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죽었다. 큰 소리가 났다. 그녀는 생전 그렇게 큰 소음은 들은 적이 없었다. 살겠다는 의지로 자살에 전향했던 난간에서의 고막 울림도 떨렸던 첫 키스 때의 심장고동도 현실에 반목하는 육신의 폭발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몽환이 터졌다. 전신을 찢는 영혼의 절규가 고성을 높였고 그..
Sound 0007/ 1984 영혼이 커 갈 즈음, 청년이라면 치르는 노란 신문의 정기구독은, 성인으로 나가는 의식 가운데 하나다. 나는, 첫 신문을 구독 받은 그날을, 파란 선인장의 실족 사건으로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배달함에 빛나는 노란 신문의 위용을 감상하느라, 나는 오른 손에 들린 선인장도 잊고 있었는데, 그것을 집어 드는 순간 선인장이 바닥 아래로 떨어져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울면서 바닥을 파헤쳤다. 성인들이 몰려와 나를 말렸고, 나는 선인장을 구하느라 마루가 핏빛으로 물들 때 까지 계속해서 긁고 있었다. 손톱이 떨어지고 눈물이 머리에서 쏟아졌다. 나는 노란 신문의 신성한 구독 의식 첫 날을, 빨간 피와 파란 선인장의 앙상블로 초록에 지천으로 뒤덮어 나갔다. 나에게는 일 년 동안의 ..
Sound 0006/ 1984 그는 외톨이였다. 공허하게 한 곳을 응시하고, 생의 기력을 뿜지 않는 방관자, 경쟁하지 않으세요? 하고 물으면, 나는 낙오자니까, 대답하는 무기력한 자. 패잔병의 두 팔이 나를 맞이했다. 그것은 자신 삶의 기력에 대한 유일한 투자 같았고,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조촐한 환영에 내 몸을 위탁시켜나갔다. 거대한 팔이 조몬 삼나무처럼 하늘로 솟아, 새들과 얘기 나눌 만치 무성하게 자라있다. 나는 팔의 어느 지점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영혼은 밝지만 육체가 어둡네, 내 거할 곳이 어디라니, 나는 한 뼘 서 있을 곳이 없으니, 외로운 영혼은 육체만큼 어두워지네.” 패잔병의 머리카락 한 올이 나에게 다가와, 외롭고 공허하다, 네 노래가 나를 더 노쇠하게 만들어 기분이 좋아, 내게 그것..
Sound 0005/ 1984 나는 가슴이 아팠다. 내가 나에게 드리운 가식의 가면, 그것을 쓴 채, 그녀를 보고 있는 이 처지를, 그래서 보는 그녀의 눈 속은, 자신의 비밀을 숨기는 외줄의 곡예사였다. 나는 어색한 외줄의 흔들거림에서도, 그녀의 오만한 시선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으며, 나락의 끝에선 전장의 패잔병, 두 팔 속으로 빨려들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걷는 가식의 걸음걸음은, 그러다 문득, 여느 지점으로 하여 그녀 눈 안에 비친 본인의 면상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가면을 쓴 내 영혼의 일그러짐 이었다. 그녀의 그는 나를 바라보고는, 네 자신의 영혼을 결박했다 소리쳤고, 나는 그녀로 향한 걸음을 멈추어 팽팽한 외줄 위를 내려갔다, 흔들리지 않으리란 다짐과 함께.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