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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Sound 0044/ 1984 두려운 것은, 육체의 망각적인 죽음 아닌, 결실 없는 풀밭 위 아이의 죽음이다. 의자에 앉은 노 거구의 공작은, 여든 나이 같지 않은 젊음으로, 측근을 탄복케 만든다. 그러나 일어서면, 종탑만큼 흔들리는 노 공작의 다리는, 아득한 시간만큼 과거의 상흔을 가늠케 해 낸다. 흔들리는 가슴 팍 십자가는 빛을 읽고, 그들은 몰려들어 넘어질 것 같은 공작의 다리를 붙잡는다. 그러나 풀은 돋아야하고, 아이들은 죽어야 한다. 방울소리가 가운데 있다. 그것은 인지되지 못한다. 아득히 들리는 종탑의 소리만큼,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무게를, 다만 때때로 가늠케 해준다. 사람이 짊어진 스스로의 과거는, 그 무게로, 나약해진 종아리의 길이만큼, 세월 부담을 얹어 바람이 된다. 죽어간 아이의 시신..
Sound 0043/ 1984 우린 썩어야 해. 썩어 부패하지 않는다면, 우린 얼마나 끔찍한 존재가 될까? 영생을 누려 산다한들, 그 존재에,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이 땅을 위해서라도, 또 존재의 후손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욕심을 버리고 썩어 가야해, 아니 준비해야해. 무대는 끝나가고 있어. 커튼을 내리는 도르래 소리가 들려. 암막 뒤로 숨어, 이제는 부패할 준비를 해야겠지. 껍질은 땅으로 스며들고, 영혼은 공중으로 비상할거야. 영원한 기쁨을 느끼며, 손발 주름을 때내는 거지. 그러면 저기, 북극성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가 당신에 바라는 것은, 사념 없는 별 되는 것. 태연자약 빛을 내는 것이야. 죽음은 토옥의 풍요를, 우주엔 낭만을 토핑해내지. 우리가 죽을 땐 있지, 같은 시간,..
Sound 0042/ 1984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억울했다. 해명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무엇이 있어, 나는 입을 다물고 내장을 터뜨렸다. 군무의 일방적 편승은, 여론의 편견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내 주위로 몰려들어 조롱했고, 비난 웃음 등을 면전 위에 내던졌다. 나는 그들 비웃음이 당연하다는 듯, 미소 짓고 동조했다. 무지한 척, 천치 같은 이빨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광대였다. 군무 유머의 표상이었다. 짙은 화장을 하고, 씁쓸한 웃음으로 예의 환대하는 것이다. 사색하던 영혼은 사라졌다. 가면이 남아, 무대 위를 맴돌았다. 객석 군무의 대게는, 얼빠진 내 표정에 열광했고, 또 폭소했다. 때로 몸을 젖혀 웃고, 참을 수 없다는 듯 배를 잡아 객석도 나뒹굴었다. 군무가 지탄하면, 난 웃고..
Sound 0041/ 1984 살아가는 것이란 무엇인가? 구걸하는 흐트러진 걸인도, 소주를 마시며 망연히 앉아있는 더러운 광인도, 그들을 스치는 부지런한 샐러리맨들, 젊은 연인의 달콤한 발걸음도, 살아가는 것이란 무엇인가에서는 무색해진다. 어떤 것이 한스러워, 비참한 표정으로 대낮 눈물을 훔쳐내는가? 먼지가 뿜어나는 지하철 환풍구 덮개엔, 통렬히 울고 있는 얼음 걸인의 광기에, 보도까지 노랗게 물들었다. 하나의 객체가 고난을 받는다거나, 해서 불운한 존재다 단정 지을 순 없을지라도, 그를 스치는 무수한 발걸음은, 비참한 심경으로 혀를 차며 자신 삶을 일부분 투영해준다. 미안하지만, 나도 비참하다네. 눈 속을 찌르던 고통, 비난할 수 없던 도회지인의 단호함. 어느 곳에나 걸인과 정상인의 모호한 범주는 규정..
Sound 0040/ 1984 가위가 있었다면, 태양을 잘랐을 것이다. 떨어지는 책장과 조용한 먼지. 그 사이를 비집던 행복한 햇살. 한낮 정오에 어울리지 않던, 그리고 노을빛 태양. 그것은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소리치고 발버둥 쳤더라도, 솟구치는 것은 혀끝의 침뿐. 나는 조용히 책장을 뒤척였다. 마른 손끝은 육상의 물고기처럼 메말랐고, 세치 혀가 그 위에 민물을 끼얹었다. 평안한 정오의 어느 날, 그러나 알 수 없는 적막의 고요가 싫어, 끝없는 허무를 찾던 전철의 어떤 자. 육중한 전차가 어느 역에 도달하자, 쇳소리에 책장 위 태양은 사라졌다. 나는 읽고 있던 문맥을 떨쳐내고, 기분 묘한 환상에 휩싸였다. 현실에서 벗어난 비현실의 미래가, 어슴푸레 감지되는 것이, 현재와 다투었기 때문이다. 과중한 업..
Sound 0039/ 1984 그렇다. 우리는 동일한 시스템에 살고 있다. 동일한 알고리듬에 갇혀, 동일한 상태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은, 기분 나쁘게 신비롭다. 하나의 틀을 만들어, 그 속에 스스로 들어가 생활한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체계화 된 군무의 벌레나 동물 또는 프로그램으로 짜여 진 로봇 등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사람이, 그것도 창조로 생장하는 인간이 그렇다는 것은, 어쩐지 믿기 어려울 만큼 신비롭다. 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렵다. 의지를 꺾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 틀의 이른바 룰을 따른다. 법규와 법칙의 조항 등을 규정해, 그것을 합목적인 의미로, 또 가치지향의 사고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
Sound 0038/ 1984 신은 이런 식으로 얘기하곤 하지. 예컨대 전철에서 내릴 즈음, 나는 가방을 들고 좌석에서 얼어나, 출입문 앞을 바라보고 서서는, 차창에 반사된 내 얼굴을 망연히 바라다보지. 유리 너머엔 비가 내리고 있어. 조야한 물방울이 창밖에 튀어서는, 풍경을 한 두 치 왜곡 시키고 있는 거야. 그럴 땐 짧은 섬광이 머리를 지나, 나는 좌석으로 되돌아가 두고 내릴 뻔 했던 우산을 집어 드는 거야. 때로 신은 이런 식으로도 얘기하지. 지음인의 입을 통해 말하는 거야. 당신이 잠들던 사이. 신은 지인의 꿈속, 혹은 사념 속에 들어와 기묘한 메시지를 각인시켜 놓지. 어느 날은 친구와 잡담을 나누다, 가벼운 신변잡기 속에서 마음 속 울림, 이른바 심적 감동을 느끼게 되는 거야. 자신이 찾던 대답..
Sound 0037/ 1984 겨울이 좋아. 왜? 두꺼운 옷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야. 숨기고 싶은 게 많은가 보지? 응. 어떤 작가는 어떤 책에서 이렇게 말하더군. 어떻게? ‘그래서 나는 내 안으로 숨어들었다.’ 글쎄. 전후 맥락을 몰라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 알 필요는 없어. 나도 앞뒤는 생각나지 않아. 단지 그 문장만 생각날 뿐이야. 넌 정상이 아냐. 누구나 너처럼 숨고 싶어 두꺼운 옷을 입진 않아. 또 그것 때문에 겨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않고. 내가 보기엔, 네 마음엔 너와 다른 많은 인격이 살고 있는 것 같아. 그것을 가리고 싶어, 차단하고 싶어 세계와 결별하고 사는 거지. 그런 식으로 세계와 구별 지으려는 넌, 솔직한 사람이 아니야. 그건 확실해. 난 두꺼운 옷을 입고 눈길을 걷고 싶어...
Sound 0036/ 1984 도시에 이르러, 내 삶은 제자리를 찾았다. 다른 의미로, 군무 일부에 흡수됐다. 나는 생의 고락을 다시금 감내해야했다. 북극성의 위로는 망각됐고, 내 삶은 또 다시 별 없는 우주가 됐다. 세계에 무가해한, 더불어 무가치한 삶이 사방을 덮었고, 나는 건조한 생의 인두겁과 마주한 생활을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도심의 고통은 둔감에 눈이 멀고, 나는 매양 그런 것이 도회지 생의 일상적 표상이라 자인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넘칠 것도, 그렇다고 부족할 것도 없는 생활이었다. 사랑의 실족을 제외한다면, 냉담한 현실의 삶을, 나는 충실히 따라갔고, 또 만족하고 있었다.
Sound 0035/ 1984 나는 설국 어느 지점에 이르러, 눈 덮인 전나무를 향해 소리쳤다. 사랑하고 싶어. 그렇게 사라지고 싶어. 지천의 하얀 수목은, 고요한 소리로 눈서리를 흩뿌렸다. 멀리 까마귀가 날고, 잔설 일부가 퍼덕이던 날개아래 요란했다. 목소리는 메아리쳤다. 그것은 기다리던 수목 속에 천천히 사라져갔다. 외로웠다. 얼마를 망연히 서 있자, 노랗던 태양은 석양이 됐다. 새빨간 초승은, 북으로 비죽한 황금 전나무를 머금더니, 고고히 일어섰다. 북극성은 그즈음 찾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다가와 몸을 녹이렴. 사는 것이 두려울 때, 네 마음이 차갑게 얼었을 때, 다가와 몸을 녹이렴. 그렇게 위로 해 줄 테니, 다가와 몸을 녹이렴. 나는 그렇게 하얀 눈밭에 엎드려, 북극성과 면면했다. 대화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