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광포한 그녀 본문
Sound 0014/ 1984
여자 얼굴은, 주전자처럼 부풀어 있었다. 화가 잔뜩 낀 얼굴엔 웃음이 없었고, 스산한 한기가 인두겁 위를 맴돌고 있었다. 나는 적갈색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이제 막 들어온 새침한 캐시미어코트의 그녀를,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툼한 회색 화장기 위엔 인조적 얼굴이 솟아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광포한 에너지가 여자에게서 독아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당황한 내심을 가리는 기척으로, 자리에 앉아봐 잠깐, 하고 퉁명스럽게 여자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반응도 없었다. 웃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닌 뻣뻣한 면상에, 마네킹처럼 단단한 표정으로 내 곁에 서 있을 뿐이었다. 죽어있지만, 살기위해 공기의 이슬을 빨아들인 주검의 복사. 새까만 건조가 그녀 전신 구석에 단호히 박혀 있는 것만 같았다. 여자는 한참을 뜸들이다, 가야해요, 하고 짤막하게 말했다. 억누른 자신의 감정이 드러날까 강단 있게 내 빨고, 더불어 마뜩한 심경도 들춰내는 역설적 억양이었다. 두 개는 숨김과 드러냄으로 가감을 이루는 듯 했다. 균등한 평행은, 그래서 영원히 마주치지 않을 유클리드 기하에서의 장구한 직선선로로 내비쳤다. 그 위는 강한 자아와 나약한 자아가 각 기에 올라타, 무구한 평면을 영원히 질주하는 전차처럼 보였다.
너는 항상 그런 식이야. 잠깐 앉았다 가라는 말인데 뭐가 급해서 그렇게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사라지려는 거니? 나는 여자를 궁지에 몰듯, 상황을 희화화하는 식으로 되물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이마 위 땀방울을 옹송그렸다. 창밖은, 구추의 햇살인지도 모르는 백색 눈발이, 계절 감지도 못하는 냥 거센 눈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여자가 오기 전은 번개가 치더니, 이윽고 폭풍우라도 서물거릴 성 한 날씨였다. 기이했다.
그녀와 나, 실내외 등은 어딘지 모르게 뒤틀린 꿈같았다.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몽환적이지도 않았고, 동화적이지도 않았다. 각계의 양분된 세계에 투명한 유리가 경계해 있어, 같지만 다른 서로의 존재를 쌍둥이처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자코 의자를 빼내서는, 무겁게 맞은편으로 착석했다. 창가로 면한 나와 여자의 테이블은, 그녀의 새빨간 캐시미어 색상에 도드라지게 붉어졌다. 나는 창밖과 여자를 번갈아 살피고 새까만 드립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탁자 위에 종이 잔을 내려놓자, 침묵했던 여자는 입을 열었다.
꿈에 빠져들기 전, 타자와 즉자의 기묘한 공간, 너 없이 죽음을 떠올리는 것, 좋지 않아? 대화라는 것은 기뻐. 숨겼던 견해를 말하고 사랑에 관한 은밀함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야. 그런 풍요는, 요컨대 바다에서 시작됐던 것. 그것은 화가의 대지처럼 새로움을 창조했던 곳이지.
시뜻했던 여자는, 보일보 얘기를 시작했다. 번연했던 백주 눈발은 그쳤고, 구름은 짙어지고 있었다. 나는 면난한 얼굴로 그녀를 살폈다.
너는, 억겁동안 찢겨진 깃발 아래 살면서 주야 빛도 없는 도심 속 어둠, 노래 없던 암울한 성벽 아래 살아왔지. 하지만 바다는 쾌활한 당신의 본래를 일깨웠어. 새까만 동공을 고착시켜 방축했던 머릿속 악사도 일으켰지. 그리고 파도를 드높였다. 찬란한 음파는 대양에 솟구친 은빛 갈매기처럼, 그렇게 반짝이는 기쁨으로 세계를 연주했고, 삼나무에 매달렸던 백양 천사 전부는, 환희에 기뻐하며 땅 속 악마와 손을 잡고 춤을 췄지. 대지에 피어난 화가의 딸들은 정오의 시계를 새벽에 선물했다. 햇빛은 눈감아 주검을 드러냈고 즉자 없던 꿈속은 어둠으로 썩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