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몽환 나비 본문
Sound 0026/ 1984
그날이 그랬다. 나비가 날고 있었다. 노랗다. 태양과 닮아서 손을 뻗었다. 사뿐히 엄지손에 앉다가는, 하늘로 사라졌다. 예쁘다. 태양은 어디에나 있구나. 짧은 조우가 아쉬워, 나는 고개 떨쳐 상심했다. 그러다 거의 동시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커다란 군무가, 내발아래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었다. 계단을 오르고, 서로를 밟아 이전투구 하고 있었다. 남보다 조금 더 진일보하기 위해, 포석과 지점 차지로 여념 없는 중이었다. 비명이 들렸다. 때로 선혈이 솟았다. 사태를 인지 한 난, 황급히 고개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현실을 직시했다. 나도 계단 어디를 오르고 있구나. 순간, 노쇠한 절름발이가 등 뒤를 찔렀다. 날선 예봉이 느껴졌다.
"그렇게 기어오르더니, 고작 내 발 앞이구나. 네 성실의 아킬레스건이 뭔지 아나? 바로 그 지긋지긋 한 성실. 다시 말해 성실의 역설이라는 거지!” 하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나는 두려워, 반사적으로 그의 눈을 찔렀다. 고성이 울렸다. 피가 튀고, 절름발이는 군중 어귀로 사라졌다. 심장이 뛰었다. 동공이 확대됐다. 정황을 판단 할 수 없던 난, 지천의 위기를 직감했다. 왼손에 쥔 단검은, 검붉은 만년필이었다. 찌른 연고의 횟수대로, 그 촉수는 피딱지에 번들댔다. 나의 총체였다. 역사였다.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나. 투기와 살해, 오만한 입신양명을 저당 잡은 나. 소소한 노란나비에 현실을 퇴색시키는 것은, 그런 내겐 어울리지 않던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진정한 현실일까, 나는 고뇌됐다. 한 뼘 계단을 오르면, 그 수고만큼 상념은 어깨를 짓눌렀다. 살기위해 죽여야 하고, 죽음에 이르기 위해 몽환을 깨는 것. 살해가 끔찍해 꿈꾸고, 양비로 현실과 몽환 사이를 반동하다가는, 죽음의 위기에 리얼리스트가 되는 것. 더러운 에고이즘, 이 비열한 몽환주의자.
냄새나는 뒷간 전등의 깜박거림을, 누군가 다가와 꺼버리기 전, 나는 결단해야 했다. 칼을 들고 앞서 뛰든, 연필 들고 뒤처지든. 또는 그 접점, 명약관화한 공리의 경계에 고착 돼, 세인의 한 덩이 배설물이 돼 버리든, 나는 결단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