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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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Fugitive essays

분노하세요.

스티붕이 2011. 10. 2. 23:34


한 학생과 같은 버스를 타는 여정이 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과를 잘 못 들어온 것 같다며 실용 디자인에 대한 푸념을 늘어논다. 그림 그릴 때는 행복하다, 하지만 실용적인 학문은 나와 맞지 않고 더욱이 그런 분위기에 소외를 느낀다고 말했다.

객이다. 낯선 것이다. 들뢰즈는 그런 것은 절름발이며 광인, 또는 낯선(insolite, uncanny) 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 인자는 중심의 이동, 즉 데리다에 따르자면 전위의 전복인 셈이고 기성을 해체시키는 에너지원이라고 주장했었다.

나는 그런 얘기들을 하면서, 삶이란 규정되어진 것 즉 포메리움들에 대항하는 투쟁이라고 덧붙였다. 또 투쟁의 대상은 주체 외부만이 아닌 주체 내부의 것, 다시말해 단단하게 굳으려는 고목의 껍질과 같은 '개인'에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학생은 을지로 입구에 들어서자 내릴 때가 된 것 같다며 가방을 주엄주엄 챙긴다. 그러면서 "맞아요 선생님, 아무래도 그림을 그릴 때는 솔직히 자동화 된 것 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릴 때가 더 많았던 것도 같아요."하고 고백하듯이 말했다.

투쟁의 대상은 언제나 두 가지다. 인식주체를 포위하는 외부의 단단한 규정, 규범들 그리고 인식주체가 타성에 젖는 내면의 연약한 규정, 습관들이다. 난 되돌아가려는 학생을 향해, "분노하세요." 하고 억지스럽게 덧붙였다.

그렇다. 결과적으로 모든 '흔적(또는 결)'은 분노의 발현인 셈이다. 분노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아시키고 발화시키는 근본이다. 그것은 엔그램(또는 표의)의 잔기(residium)며 결과적으로 '꽃(또는 표상)'을 개화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되돌아가는 그를 보고 있자니, 이 모든 것은 결국 내가 나에게 하는 말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묘했다. 구추햇살은 여전했고, 차창은 그 열기를 받아내고 있었다. 뜨겁고 무더운 일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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