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눈먼 시인의 카페 본문

Essays/Sound of city

눈먼 시인의 카페

스티붕이 2012. 7. 19. 18:12

Sound 0009/ 1984  

사람은 꿈을 꾼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죽어있다는 의미다. 또한 살아있기도 하고 죽어있기도 한 의미다. 

꿈은 곧 신이다. 신은 살아있기도 하고 죽어있기도 하다. 신은 곧 꿈이다. 꿈은 죽어있기도 하고 살아있기도 하다. 또한 그 둘이다. 이것은 동시적이며 상대적인 속성이다. 현실과 가상의 모호한 경계다. 말하자면 붉은 대지와 파란 하늘의 수평선이다. 그 끝의 중간색상. 이원화된 양극 이전의 모호한 색깔이다. 붉다. 그러나 동시에 파란 이들의 색상은, 존재 이전의 존재로, 이원화되었던 존재들을 떠받친다. 나는 동시적이며 상대적인 속성을 통해 꿈과 신에 대한 기묘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은 꿈 스스로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과 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 세대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했다. 현실은 가상이었다. 또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현실이면서 가상이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졌다. 어느 지점이 현실이고 어느 지점이 가상인지, 그 구분은 점점 더 무의미해졌다. 나는 이것을 신의 꿈이 세계를 지배하는 증거라 생각했다. 신은 자신의 꿈으로 사람을 지배했다. 사람은 자신의 꿈으로 세계를 지배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이념과 이데올로기 등을 통하여 세상을 지배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존재 이전에 존재했던 모체의 구성은, 기실 신이 꾼 그 자신의 몽환이었다. 그들은 알지 못했다. 이원화된 양극을 내달리는 이들의 존재에, 사람은 어떠한 중간색상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니까. 우리 세계에 존재했던 것은 단순했다. 흑과 백, 좌와 우, 적, 아군 등.

사람이 더 많은 꿈을 꿀수록, 신은 그 자신의 지배를 넓혀나갔다. 그럴수록 세계는 더 빨리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중간을 건너는 몽환의 인간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방축을 거닐며 그 자신의 꿈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했다. "현실과 가상의 이원화된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 세계는 종말 할 것이다. 꿈은 스스로 자신을 벗어날 수 없었고, 신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없었기에, 그는 사람을 통하여 세상의 종말을 실현시켜나갈 것이다." ‘눈먼 시인’은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처음 그녀, ‘눈먼 시인’을 만났던 것은 몇 해 전 꿈에서였다. 그때 나는 뱀의 비늘처럼 미끌미끌한 외줄을 걸으며, 그 끝의 어떤 거인 형상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거인은 희뿌연 안개에 가려져 있어, 그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그것을 바라보고 걸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여느 거인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외줄 끝에선 거인은, 희뿌연 안개에 가려져, 그 큰 몸집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어느 여자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여자는, 외줄의 끝에 선 커다란 거인이었다.

내가 처음 그녀, ‘눈먼 시인’을 만났던 것은 몇 해 전이었다. 그때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의 전령으로 보였던 그녀는 노란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있었다. 나는 뱀의 비늘처럼 미끌미끌한 외줄을 타고는, 그 끝에 선 어느 여자에게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처음, 자신의 외투를 찢고 내 면상 앞으로 다가와, "헐벗은 호랑이가 있습니다. 가서 먹이를 주세요. 그가 굶주려, 당신 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고 쫓기는 듯 말했다. 나는 내 꿈에 당혹하여, 현실과 가상의 중간에 낀 채,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가상인지 구분하려 잠시 생각했다. 지체에 당혹해 하는 그녀는, 마치 헐벗은 호랑이가 자신 옆에 있기라도 한 듯, 애달픈 표정으로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촌철의 마디만큼 떨어진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기도, 내 뒷머리를 바라보기도 했다. 맹인인 그녀가 어떻게 나를 보는가, 나는 어색한 듯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그녀는 양 미간을 찌푸린 채 침울한 표정만 지어보였다. 빨간 장미가 몇 송이 피어난 그녀의 얼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뱀의 혀와 같은 당신의 미모는 삼손을 유혹하는 데릴라다. 내 머리칼이 당신 손에 쥐어지는 순간, 육신은 굶주린 호랑이의 이빨 앞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절세가인에 한눈 팔린 멍청한 나를 지탄하고는, 호랑이 내장 속으로 스며들고 말겠지. 앞이 보이지 않는 자가 하는 말은 믿지 않는다. 굶주린 호랑이? 그는 내 세계에 실존하지 않았다." 나는 경멸 찬 입술을 만들어 ‘눈먼 시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피었던 장미 하나가 꺾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말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세계의 절반입니다. 보이는 세계만 믿는 당신은 나머지 세계에 대한 기만자군요. 꿈과 현실, 배고픔과 배부름, 해와 달 등에 당신은 어디만 진실이라 선택하고 서 있나요? 육신의 눈을 닫으세요. 내면의 눈은 굶주린 호랑이를 보여줄 것입니다." 나는 잠시, 어떤 선택받은 특권자 인 냥, 득의에 찬 기분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그녀가 내 내면을 읽기라도 한 듯, "오만한 선민의식! 당신만 선택되었다는 착각은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또 다른 기만입니다. 모든 사람들에, 그 기다림은 동일하답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기묘한 실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적의에 찬 미소이기도 했다. 내가 내 몽상에 지배되는 것 같아, 이것은 또 다른 내가 아닐까 생각하다, 그녀가 새빨간 광야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갑자기 그녀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급한 마음에 여느 질문을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은 구차한, ‘진리란 무엇인가’의 모호한 질문뿐이었다. 어차피 이것도 내가 상상하는 자문자답 아니겠는가 하고 조소하려 들자, 그녀가 눈을 뜨고 말했다. "책이 책상 위에 있습니다. ‘책이 책상 위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애달픈 표정이 무덤덤한 말투 뒤에 사라졌다. 그녀는 얼마간의 정적을 이끌었다. 한참 후, 눈먼 시인은 붉은 광야를 걷다 마을 아래로 내려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세계는 태연자약했다. 나는 망각이라는 인간의 축복을 받아, 그 꿈을 잊어가고 있었다. 유년의 추억도 현실과 망각에 버물리기 일쑤니, 여북하여 수년 전 꾸었던 꿈인들 잊혀 지지 않고 남아 있겠던가. 나는 바쁜 일상을 오갔다. 때때로 불안한 휴식을 취하며 근근한 현대인의 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게 어떤 미래가 있다거나 진부한 꿈 등이 있기는 만무하여, 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세계의 부속품으로 전락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만족스럽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불만족스럽지도 않았다. 세계가 요구한 생명의 요건에, 나는 어느 정도 부합하고 있다 생각했다. 건실한 여느 회사의 한 사원이며 세계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생명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나는 상품에 찍힌 일련번호마냥, 어느 제조사의 특정한 자산이라는 가치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 영혼을 담보로 제공받았던 간헐적 생명의 수혈이었다. 그들은 급여가 제공되는 임금노예의 관계를 요구했었고, 나는 피할 수 없는 함정에 빠져드는 시늉으로, 영혼을 저당 잡아야 했다. 나는, ‘언젠가 이 채무 관계가 정산되면, 내 영혼은 자유를 누릴 것이다.’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내 영혼은 파산되고 말았다. 영혼은 경매에 붙여졌고 세계는 그것을 사들였다. 난 속박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연로한 현대인은 말했다. "그것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나는 굳어가는 육신의 껍질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눈물이 마르는 신기루였다. 현실의 돌아간 건조한 나는 세계의 등껍질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나에게 존재라는 의미의 달란트를 부여했다. 나는 만족스럽지도, 그렇다고 불만족스럽지도 않았다. 나는 영혼을 잃은 건조한 현대인이었다.

그 꿈을, 어제 다시 꾸었다. "헐벗은 호랑이가 있습니다. 가서 먹이를 주세요. 그가 굶주려, 당신 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호랑이를 볼 수 없었다. 내 주변, 현실과 몽상의 어느 곳에도 굶주린 호랑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붙들었다. "지난 꿈과 변한 것이 없구나. 너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인가? 전자레인지에 쌀밥을 돌려 먹었더니, 여성 호르몬이 주체할 수 없이 증가했던가? 인격의 한쪽은 이제 계집으로 변해버렸네!" 나는 투덜대는 억양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호랑이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를 피해 산으로 달아났습니다. 호랑이가 나에게 달려들어, ‘거실이 어디 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