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켐트레일을 통한 사유 본문
Artist note
바라보고 있지만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것은 죽어 있는 것이며 살아있다고 볼 수 없는 다른 차원의 대상과도 같은 것이다. 주체에게 있어 인식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감각을 통한 인상의 개입을 거부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에게 있어 감각과 인상의 조합은 경험을 이끌어낸다. 우리들에게 있어 경험이 없다는 말은, 주체가 대상에 대한 아무런 관찰 또는 흥미 등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해 낸다. 그러한 것은 살아있지만 죽어 있는 것이며 바라보고 있지만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건조한 목도 주검의 동공과도 같은 뜻인 것이다.
비행체는 날아간다. 국적을 알 수 없다. 비행금지구역이라고 불리우는 청와대 상공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확인할 길도 검증할 방책도 없다. 그냥 비상하니까, 비행운을 만드는 전투기 정도로 치부할 뿐이다. 그야말로 죽어있는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다. 이 비행체의 구름은, 다소 별난 이름으로 회자되고 있다. 켐트레일이다. 켐트레일은 케미컬과 콘트레일의 절묘한 합성어다. 화학적 비행운 정도로 해석되는 이 대상은 우리들에게 낯설다.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기억되어 있지 않은 절명의 중간에 있다. 어디선가 본 적 있을 법한 그것은 콘트레일(비행운)로 기억되어 있으며, 그 형체는 오늘의 그것(켐트레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스터리가 발생한다. 그런데 정말 과거의 우리들 기억 속에 있는 그 비행운의 흔적들일까? 즉 인상들이란 말인가? 쉽게 대답하기 힘들다. 콘트레일은 짧은 길이로 곧 잘 증발해 버리는 반면, 켐트레일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하늘에 적게 잡아 네 시간 이상은 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에 대한 상식의 위배다. 보편적 기억의 틈을 탄 그것은 도적과 같다. 닮았지만, 결코 그것이라고 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추론은 시작됐다. 하늘에 뜬 그것은 근거 없는 음모론자들의 낭설인지, 혹은 다중의 무지인지 그 불편한 사실관계는 우리들 눈 앞에 떠 있다. 지난 공휴일, 그러니까 어제에도 켐트레일은 서울 상공에 연달아 뿌려졌다. 날씨가 좋은 날이라면 대체로 우리들 상공을 수 놓는다. 알 수 없는 그것은 쉬이 넘겨버리자면 아무 것도 아닌 공군의 정찰 활동, 혹은 군사작전의 일환 정도라고 단언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리한 탐구의 공방은 쉼 없이 계속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대상에 관한 미적지근한 사실이다.
몇 발자욱을 걷는다. 카메라는 하늘을 조망하고, 프레임은 대기를 향해 열려 있다. 관심은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조명들. 흄에 따르자면 감각의 집합들은 공시적 진실을 규명해 낸다. 그것은 라이프니츠에 따르자면 무수의 실체인 모나드일 수도 있고 보편적 아르케의 개물(눈 앞에 있음) 일 수도 있다. 규정할 수는 없지만, 검증의 연속을 통해 실체를 파악해 나갈 뿐이다. 인간의 사유는 주체가 가지는 흥미의 대상에만 촉수를 드린다. 시그널은 한쪽 방향에서만 수신될 뿐, 다면을 관통해서는 수신될 수 없다. 그것이 '바라보고 있지만 바라보고 있지 않는' 인간의 지적 한계를 드러내는 오묘한 부위가 되는 곳이다. 끊임 없이 수신되는 정보는 프레임을 가득 채운다. 메모리 카드는 연신 차오르고, 보이지 않는 패킷은 소통의 수단을 통해 확산된다. 내 의지는 반성을 통했던 것이며 수행은 카메라의 셔터로 대체되고 있다.
사람에게는 별난 버릇이 있다. 특별한 고민 없이 목적지를 향해 하릴 없이 걸어 가는 것. 그 끝은 그 실체가 무엇으로 드러난다 할지라도 우리는 걷고 또 걸어나가려는 속성을 지니게 된다. 정상을 향할 때는 고도의 끝을 향해. 정상에 올라서서는 하행의 도착점을 향해 걸어나간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 같은 (지긋지긋한)성실함은 삶의 본위도 잊게 만든다. 기계적으로 걷는 우리는, 생각해 보자면 어느덧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며 형벌과 같은 보행의 수행은 우리의 신체를 움직이게 만들어 지적 호기심과 관음 등을 자극시켜 내게 되는 것이다. 육체는 피로를 풀 겨를도 없이 정신에 귀속 되어서는, 먼저 간 사고의 영령을 보살필 겸 쉼 없이 걸어나가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카메라 앞에선 나로서도 마찬가지다. 프레임을 기록하는 행위는 기계적인 반복의 일환인지 혹은 진실규명을 위한 몸부림의 일환인 것인지. 더불어 프레임을 넘어선다면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은 진실로 인식될 수 있는 성질의 무엇이기 때문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인가? 대답은 세 가지다. 그렇다. 아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 같은 어정쩡한 대답은 수축과 팽창, 수축팽창의 양가지적 속리와 닮았다. 패러다임을 외쳤던 토마스 쿤은 시대를 규명하는 통시적 인식(공시적 인식을 위해)을 주창해왔다. 오늘의 우리가 직면한 현실(오늘의 패러다임)은, 검증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위의 세 가지 대답 면전에 서 있다. 머지 않아 우리들은 세 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될지도 모른다. 단언될 순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애매한 세 가지 모두의 답을 '우선은' 정답이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일런지도 또한 모른다. 인간은 팽창하는 우주에 살고 있기도 하며 수축하는 우주에 살고 있기도 하다. 또한 팽창과 수축의 영원한 반복을 계속하는 우주에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리 앞에 선 우리의 추론은 언제나 그곳 까지다. 한계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위의 방벽을 단편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단지 동시적으로 추구해 나갈 뿐이다. 기계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기계로서의 나는, 연급되는 질문의 대답에 마음편한 대답을 선포할 수 없다. 감정은 표출할 수 있지만, 공론화된 언어로 규명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백과사전의 지식에 사로잡힌 나의 한계며 우리의 한계다. 이 모든 것은 알지만 동시에 모르고 있는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기묘하고도 불편한 진실은 계속 된다. 진리 찾기도 계속되고 있다. 즉 바라보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무엇이라 지칭해 주지 않았다. '공적인 영역'에 놓여 있는 '사회적 사전'은 계속해서 백지(티브라 라사) 상태다. 여론은 없다. 광장은 춥고 사람들은 집을 향해 뛰어갔다. 이제 빈 페이지는 무엇으로 채워져야만 하는가? 구걸하던 걸인, 백정과 난장이, 그리고 광인이 애써 낙서를 한다. 이들의 낙서는 공론화 되지 못할 광기의 부유물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사이드를 이동시키는 아웃사이드의 패러다임적 기재도 되어지는 것이다. 왜? 다중이 외면한 틈(쯔뷔쩬)으로 정론(캐논)을 규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 익숙한 일련의 꼬마는 정답을 찾아 헤맨다. 난무하는 정보의 바다며, 불확실한 사전의 기록들. 그럼에도 눈 앞을 지나가는 저 하늘의 연기들, 또 비행체들. 그들과 우리는 사람이 살지 않는 광장의 한 가운데 기이한 중첩지대에 머물러 있다. 인간의 일반적인 추론 행위는 생경한 바다와 지루한 기억의 육지를 상회하고는 한다. 바라보다 상기하며 외면하다 절명해 낸다. 그와 같은 반복되는 수축과 팽창은 어른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
혹자는 창문을 열고 이렇게 외치기도 하는데, 그것은 비트겐슈타인. 말 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는 판단 중지의 선언서. 그렇지만 그의 판단 중지는 불통과는 차이가 있다. 토놀로지적인 이 어법에는 패러독사의 마술이 숨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침묵을 통해 불통 아닌 소통을 주장했다. 그는 기존의 언어로 이 세계를 규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새로운 언어로 보편적 세계를 규명해 내고자 노력했다. 즉 새로운 언어로 소통을 하고 싶어 했던 발로의 메시지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패기 된 사전은 우리들에게 어떠한 진실도 규명해 주지 않는다. 새로운 공시의 언어는 보편적 진리와 함께 눈 너머 어디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준비해 내야만 한다, 해석해 내야만 한다. 인식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침묵하는 반성에 대해. 바라보고 있지만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감각의 인상은 그 언저리 머물러 있다, 광기의 광장에.
Work information카메라 앞에선 나로서도 마찬가지다. 프레임을 기록하는 행위는 기계적인 반복의 일환인지 혹은 진실규명을 위한 몸부림의 일환인 것인지. 더불어 프레임을 넘어선다면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은 진실로 인식될 수 있는 성질의 무엇이기 때문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인가? 대답은 세 가지다. 그렇다. 아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 같은 어정쩡한 대답은 수축과 팽창, 수축팽창의 양가지적 속리와 닮았다. 패러다임을 외쳤던 토마스 쿤은 시대를 규명하는 통시적 인식(공시적 인식을 위해)을 주창해왔다. 오늘의 우리가 직면한 현실(오늘의 패러다임)은, 검증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위의 세 가지 대답 면전에 서 있다. 머지 않아 우리들은 세 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될지도 모른다. 단언될 순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애매한 세 가지 모두의 답을 '우선은' 정답이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일런지도 또한 모른다. 인간은 팽창하는 우주에 살고 있기도 하며 수축하는 우주에 살고 있기도 하다. 또한 팽창과 수축의 영원한 반복을 계속하는 우주에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리 앞에 선 우리의 추론은 언제나 그곳 까지다. 한계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위의 방벽을 단편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단지 동시적으로 추구해 나갈 뿐이다. 기계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기계로서의 나는, 연급되는 질문의 대답에 마음편한 대답을 선포할 수 없다. 감정은 표출할 수 있지만, 공론화된 언어로 규명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백과사전의 지식에 사로잡힌 나의 한계며 우리의 한계다. 이 모든 것은 알지만 동시에 모르고 있는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기묘하고도 불편한 진실은 계속 된다. 진리 찾기도 계속되고 있다. 즉 바라보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무엇이라 지칭해 주지 않았다. '공적인 영역'에 놓여 있는 '사회적 사전'은 계속해서 백지(티브라 라사) 상태다. 여론은 없다. 광장은 춥고 사람들은 집을 향해 뛰어갔다. 이제 빈 페이지는 무엇으로 채워져야만 하는가? 구걸하던 걸인, 백정과 난장이, 그리고 광인이 애써 낙서를 한다. 이들의 낙서는 공론화 되지 못할 광기의 부유물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사이드를 이동시키는 아웃사이드의 패러다임적 기재도 되어지는 것이다. 왜? 다중이 외면한 틈(쯔뷔쩬)으로 정론(캐논)을 규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 익숙한 일련의 꼬마는 정답을 찾아 헤맨다. 난무하는 정보의 바다며, 불확실한 사전의 기록들. 그럼에도 눈 앞을 지나가는 저 하늘의 연기들, 또 비행체들. 그들과 우리는 사람이 살지 않는 광장의 한 가운데 기이한 중첩지대에 머물러 있다. 인간의 일반적인 추론 행위는 생경한 바다와 지루한 기억의 육지를 상회하고는 한다. 바라보다 상기하며 외면하다 절명해 낸다. 그와 같은 반복되는 수축과 팽창은 어른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
혹자는 창문을 열고 이렇게 외치기도 하는데, 그것은 비트겐슈타인. 말 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는 판단 중지의 선언서. 그렇지만 그의 판단 중지는 불통과는 차이가 있다. 토놀로지적인 이 어법에는 패러독사의 마술이 숨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침묵을 통해 불통 아닌 소통을 주장했다. 그는 기존의 언어로 이 세계를 규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새로운 언어로 보편적 세계를 규명해 내고자 노력했다. 즉 새로운 언어로 소통을 하고 싶어 했던 발로의 메시지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패기 된 사전은 우리들에게 어떠한 진실도 규명해 주지 않는다. 새로운 공시의 언어는 보편적 진리와 함께 눈 너머 어디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준비해 내야만 한다, 해석해 내야만 한다. 인식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침묵하는 반성에 대해. 바라보고 있지만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감각의 인상은 그 언저리 머물러 있다, 광기의 광장에.
1984 frame series : Chemtrail in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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