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명확함'에 대해 본문
“표현 좀 제대로 해봐.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우리는 명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산다. 그것이 어떤 표현이든, 오늘날 사회는 정보전달에 있어 발신자의 명확함이 본래적 아르케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불확실한 표현, 명료하지 않은 의미는 통상 속도의 시대에 있어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그런 표현방식은 권력의 중심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며, 우유부단하고 정확하지 않다는 지탄을 받으며 사라지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상상의 발아가 명료함을 입기도 전, 대게의 경우는 사고의 초입서 그것의 탄생을 힘껏 밟아 버리곤 한다. 어눌한 무엇의 싹을 억압시켜, 세계-외-주체가 곡해될 수 있는 소지쯤은 스스로 속아내겠는 내면의지의 표명인 셈이다. 그런 행동은 라캉에 따르자면, 상상계가 이성의 합리에 억압되는 상징계로의 이행을 나타내며, 모성을 벗어나겠다는(차가운 부성을 통해) 오이디푸스 적 자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은 속도와 효율의 시대에 있어서의 통념은, 그것이 글이든 그림이든 간에, 발신자-수신자 간의 상관관계가 ‘의미전달’에 있어 언제나 명확해야한다는 것을 미덕(arete)으로 삼고 있다. 명확치 않은 것은 상대에 대한 부덕이며, 정확하지 않은 사실(non factoid) 전달은 소멸되어야할 쓰레기더미로 보고 있는 것이다. 잘못 끼인 찌꺼기는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교통을 느리게 만들고 때로는 네트워크의 망 자체를 멈추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싸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자문해 보자. 우리는 언제나 명확한 표출만을 전제하고 있는 합리적 동물인가? 이성적 효율만 강조하고 있는 차가운 인간인가? 아니다. 그노시스 적인 앎은, 명쾌하고 정확하지 않다고 해서 억압받아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명확해야만 한다는 그릇된 타성을 통한 오해며, 샤르트르에 따르자면 명백한 자기기만(bad faith)인 것이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표현에 있어 언제나 정확해야한다는 사고는, 17세기 브왈로 등을 위시한 부르주아지 세력의 효율적 사고에 그 근저를 두고 있다. 이것은 계급의 태도에 있어, 자신이 속한 계급이 타자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한 수사의 하나였을 뿐, 커뮤니케이션의 상관관계에 있어 절대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아르케 적 기술은 아니었다. 그러한 수사적 관념들은, 약호와 규약의 법칙을 만들어 허용과 금기 등을 구분 지었으며, 자의적(arbitrary) 기호만을 강조하는 통시태(diachrony)의 개별적 발화만 집중시켜내는 딱딱함을 형성시켜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언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도상적(iconic)이고 유연적(motivated)이며 또 자의적이면서도 공시적인(synchrony) 외연과 내포를 함께 가지고 있다. 롤랑바르트는 <기술의 영도>라는 책에서, 텍스트에 있어서의 명료성 그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대 사상가들인 레비스트로스와 데리다, 그리고 라캉 등과 더불어 관습적 명료성의 개념을 거부하는 주장이 되기도 했었다. 바르트에 따르자면, 저자(발신자)의 죽음은(부정확한 표현) 독자(수신자)의 탄생을 이끈다고 언급했는데, 그것은 중간지대의 지칭되지 않았던 해석의 모호가, 독자의 재해석을 통한 자발적 참여로 인해 새로운 형태로 완성(또는 변형)될 수 있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시학>에서, 재현(mimesis)을 바라보는 관객의 해석은, 그 자체로서 ‘해석에 대한 쾌’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발신자의 명확한 설명은, 결과적으로 수신자의 자발적 상상을 제한시킬 수 있는 ‘불쾌의 요인’으로 작용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명료하지 않은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의미로 ‘빛 없음이 아닌 있음’의 완성을, 불완전이 아닌 ‘완전을 위한 불완전’의 미완성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것은 덜 구워진 것 또는 날 것 그대로의 사태에 있어 자연주체로의 탈 기호적 대상으로 되돌아가, 굽거나 삭힌 것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 그것은 상징적 억압이 상상적 자유로 거듭나게 되는 것을 표현해 내며, 요리된 것 이전의 날 것 그대로의 본질로 되돌아가게 되는 우유부단, 부정확의 껍질 등을 통한 자궁의 기억을 요구하는 것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데미안의 ‘알’은 그것을 깨고 새의 날개를 펄럭이기 전, 둥지에 내포된 해석의 쾌에서 상상의 모상을 발현시킨다. 그러한 상징은 부정확한 것이 아닌 명확하지 않으려는 계획된 의지다. 그곳에는 로고스도 에피스테메도 없었다. 단지 가능성을 통해 외계로 뻗어나려는 욕망, 그리고 해석을 위한 찰나들의 개입만 부유해 있을 뿐이었다. 입을 벌려 랑그로 발화되기 전, 또는 펜을 들어 텍스트로 표기되기 전, 그리고 붓을 들어 이미지로 그려지기 전, 인식의 주체는 다만 자유로우며 동시에 불완전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으려는 기계적 인간은, 그 자체가 허상이고 망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정확해야한다는 믿음은, 아버지의 백화점에 갇힌 상징 기호계의 소품이 될 뿐, 그 가운데 진정한 인간은 없다. 다만 영혼 없는 마네킹만 전시 돼 있어, 유리창 너머를 통해 가장된 연극을 볼 뿐인 것이다. 명확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타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