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밤바다와 등대 본문
무릎팍 도사를 보니, 안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효율성만 따진다면 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 효율적인 사람이었겠죠. 14년간 의사생활이 경영에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경영이 백신개발에 쓸모없는 것이기도 했지요."
효율성은 산업화 이후의 계몽사상과 흐름을 같이 한다. 효율성은 비합리 아닌 합리를 의미하고 계몽은 감성이 아닌 이성이 인간의 사고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먼저 합리를 살펴보자. 합리(rationality)는 라틴어 라치오(ratio)를 어원으로 두고 있다. 라치오는 분배라는 ‘ration’으로 발전을 하게 되는데, 이는 나누어 쪼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합리는, 행위로 보자면 거대한 하나를 분파시켜 나누어 분배한다는 것을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외시(denotation)의 이성적 배분과는 다르게 내포의 비합리적 분열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의 합리란 다시 말해 비합리적인 내시(connotation)의 공영인 셈이다.
이어 이성을 살펴보자. 이성은 데카르트 이후에 나타나는 중세유럽의 아르케(본질)였다. 그 망령의 도가니는,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반추시켰다는 칸트에 들어서도 비난 대상이 되었는데, 현대의 하이데거는 그러한 칸트의 양가적 사유조차도 근대 망령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라고 지탄하기도 했었다. 즉 위계의 리니어로 보자면, 감성은 가장 하층에, 오성은 그 중심에, 그리고 이성은 가장 상층에 위치해 있었다고 보는 것이 근대까지의 계몽사상의 핵심이었다. 당시에 발생했던 산업화 사회는, 따라서 경영합리가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이루어내는 것이 이성적이라는 가치관을 확산시켜나갔는데, 그러한 발상은 임금착취와 노동자의 수권을 강탈시키는 것도 합리적일 수 있다는 부조리의 망상을 일으키는 근저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m)와 괘를 같이한다. 실용이라는 것은 앞서 말했던 최소투입과 최대이윤 등을 일컫는 것으로, 신자유주의 이후에 그 발열을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어, 신흥자본가나 산업 및 금융자본가 등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어오고 있는 사상이다. 수단과 방법은 중요하지 않고, 다만 경영성과와 실적만 뛰어날 수 있다면 그들의 허위는 금괴와 같은 배금(mammonism)으로 들어차도록 허용해 주겠다는 사고다. 부조리다. 상식에 반하더라도, 숫자상승이라면 그만이다. 프래그마티즘은, 실용적인 것, 합리적인 것, 이성적인 것 등의 그릇된 사유와 버물려 오늘날의 반실용(irrationalism), 비합리(connotational-rationality), 감성적인 것(emotionalism)의 존연을 부정시키게 만든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최단 거리로만 이동하려는 빛과 다르게, 인간은 때로 굽이치고 길을 잃으며 그러다 신세계를 찾는 반실용의 집적이다. 세렌게티 초원에서도 그랬고 코카서스를 벗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불의 발견은 무엇이고 우연의 발전은 무엇이며 광야와 설혹의 걸음걸음은 무엇이었나? 이진법의 비트에 따라 움직이는 오늘날의 사상은, 혹여 인간의 사고마저도 기계식으로 저울질하려는 기술결정론자들의 마당 터로 전락시키려 하는가?
안철수 교수의 효율적이지 않았다는 고백은, 결과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삶이었다는 자백이기도 했으며, 시대적 비-본래를 역행하는 당대의 등불(본래적), 즉 에피스테메이기도 했던 것이다. 장구한 밤바다의 조각배는, 적어도 등대 하나쯤은 의지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