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실존적 살아 있음 본문
현우, 해진이와 얘기했다. 진중한 대화를 할 것도 아니었지만, 어찌 하다보니 그런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맛 없는 피자를 먹었다. 자리를 옮겨 새로 생겼다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코히야라는 간판이 보였다. 일어로, 커피라는 뜻이다.
큰 그림을 그렸다. 본능적이다. 얘기는, 갈등 대상에 있어 무작위적 대상이 된다. 끝은 그것을 마무리 하는 식으로 지도를 그려갔다. 원했던 것은 아니다. 오가는 대화가, 큰 여행의 지도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이렇게 시작했다. 왜 분열할까? 갈등은 뭘까? 이념, 피안의 것 그리고 척점에 있는 천박하다는 유물적 속성, 유기물에 대한 충성 등. 둘은 경쟁하고 대립한다. 구분하는 것은 쉽다. 대상에 대해, 한쪽으로 육적인 것과 다른 한쪽으로 영적인 것을 나눠두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선호의 가치에 따라 대상을 한 곳으로 대입을 시키면 된다. 어렵지 않다.
중요한 것은, 대립되는 두 가치가 어떤 식으로 면전에 드러나게 되는 가였다. 일반적인 경우, 사고는 다면적인 터라 영적이면서 육적이고, 또는 반대 되는 경우가 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양극 구분은, 단편적 선상에선 쉽지만, 부유하는 입체적 선상에서는 쉽사리 결정시킬 수 없게 된다.
현우는, 세상의 육적 비난을 싫다고 말했다. 여성의 성적 유희가 비난 받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얘기했다. 그는, 깨끗한 척 하는 반대편의 비난이 솔직하지 않다 여기고 있었고, 위선이라 지탄했다. 내가 아는 한 현우는, 몽상가면서 세속의 상스런 대부분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러는 그가, 어느 면에서는 육체적 사고에 옹호를, 다른 면으로는 그런 허영에 비난을 하는 것이다.
카프카는, 현존적 비현존에 대한 얘기로 소설을 풀어갔다. 그곳에 등장하는 인물은 현실적이지 않으면서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다. 이 부분은 실존적 허무에 대한 지칭을 대상으로 그려내고 있어, 기묘한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 카프카는 '사이'를 지칭해 낸다. 이 같은 환상은, '그로테스크' 적으로 한 가지 원형을 지향하고 있다.
사고를 좁히자. 첫째 현실적인 것은 하나로 묶는다. 둘째,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의 대척점에 위치해 둔다. 셋째, 매체로의 대상(작 중 인물)을 현존과 비현존의 동시적인 것에 지칭해 두자. 앞선 두 개는 고사된다. 세 번째 카프카의 매개물만, 척점 외로 부유해 공간 어느 곳에 위치하게 된다. 생존하게 된다.
어떤 것도 사실 아니다. 사실 아닌 것도 아니다. 카프카의 그레고리, 이방인의 뫼르쉐 등은 비현실의 현실을, 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그려내고 있다. 내 경우, 그들 시선과 비슷한 눈으로 사이 공간을 바라보고 있다. 죽은 자는 산 자다. 산 자는 죽은 자다. 얼굴 없는 자는 있는 자고, 가면 쓴 자는 벗은 자다. 그렇게 본다면, 내 경우는 좌편향 우편향 등이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지루한 얘기 같지만, 흥미롭게 지나갔다. 커피는 두 잔을 거뜬하게 마시고 있었다. 실존적 문제까지 지나갔다. 사후 얘기까지 도달했다. 지면이 척박해 다 담을 순 없다. 흥미로운 주제였다. 세 번째 커피는 돌려마시고 있었다. 좋았다.
끝으로 한 가지만 언급한다. 사이 공간이라는 것은 경계인가? 아니다. 무색인, 아나키스트 등도 아니다. 사이 공간을 지칭하는 자는, 경계에 머무는 것과 구분돼야 한다. 언급하고 싶은 것은 입방이다. 척점으로 대립되고 있는 진보와 보수의 수평적 중앙이 아니다. 단조로운 고집인 수평으로의 유클리드 선상이 아닌 것이다. 사이 공간은, 비 유클리드적 입방을 나타낸다. 그것은 척점으로의 객체가 아닌, 입방으로의 두 가지 대상이 제외된 모든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이념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로의 '존재 아'를 나타낸다.
사이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다. 중요한 매개물(medium)이다. 절름발이다. 부족한 자다. 외눈박이며, 절대적이지 않은 어떤 것이다. 너와 나는 연결 돼 있다. 대상으로의 대립은, 어찌할 수 없는 본래적 갈등이라고 보았을 때,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양태적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이라는 중력을, 인류는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그곳에는 어떤 위상으로 치우쳐져 있더라도 불운하기 때문이다. 정의가 없고 진리가 없다. 우리가 바라봐야할 대상은, 한 가지를 아우르는 본연적 존재 아인 것이다.
문을 닫으려했다. 늦은 밤이 지나고 있다. 밤 11시다. 종업원들은 가게문을 내릴 채비를 하고 있다. 음악이 작아졌다. 손님은 우리들 뿐이다. 가게를 나와 비오는 거리를 걸었다. 새차던 비는 유순해졌다. 장마는 계속된다고 했다. 마음은 가벼워졌다. 무거운 얘기지만, 가슴은 따뜻하다. 길거리 사람은 적다. 차를 몰고 빗속을 통과했다. 차가웠다.
살아 있음의 죽어 있음은, 현존적 비현존의 '실존적 살아있음'이다. 즉 모르트 비반테(mort vivante)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