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쾌의 주장 본문
나른하다. 졸립다. 전철 서 한동안 눈을 붙혔다. 읽으려고 했던 소세키 책도 무릎에 올린 채, 허망하게 눈 감고 있었다. 어느 역에선가 눈을 떴다. 신도림을 출발하고 있었다. 햇살이 강하다. 사람들은 적어, 전차는 한결 시원했다. 홀로인 사람, 나 처럼 눈을 감은 사람, 연인들 그리고 초로 등산객 등, 전철은 평범한 일상처럼 승객을 담아내고 있었다.
충격적이지 않았다. 놀라웠다. 그 정도였다. 어제 전해들은 말로, 놀란 심경은 여한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그랬나 싶은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몇 개 장면이 생명을 받아, 사건 전개를 이어간다. 사람에 대한 측은함은 어쩔 수 없다. 그럴 수 있을 것이란 습관적인 용인, 관용은 무기력한 마음에 물을 붓는다. 그래서인지, 규정할 수 없는 기분으로 몸은 피곤만 하다.
내 쾌는, 타인의 것을 밝고 세워진 것이다. 반대다. 내 쾌 양보는, 타자를 위한 희생이다. 경계는 명확치 않다. 경우에 따라 양보를, 또는 이타를. 그리고 이기를 내세우는 것이다. 경우라는 것은 순전 상황의 주관에 따른다. 명확하게 경계지을 수 없는 그것은, 시기에 따라 명확하다 주장할 수 있고, 또 없기도 하다. 불완전한 사고는 개인 쾌 활동에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다.
타자 쾌를 바라보는 입장은, 용인하자는 측면이 크다. 이해하려고 보면, 대체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첨예한 사고 두 개가 대립하는 경우, 나는 어쩔 수 없이 사고의 방황에 흡수되고 만다. 어제 건이 그런 경우다. 두 쾌는, 어떤 연유로 인해 불가불가 공인에 드러나 버린다. 그것은 평가하는 사람 입장에 따라 옳기도, 또 그르기도 하다. 난 어떤 부분에 있어 내 주관의 해석을 드러내는 것일까, 경계란 존재하지 않을 경우.
물을 것이다. 정치적 견해, 당파적 다툼 등에 있어서는 명확한가? 쉽다. 간결하다. 이념과 사고는, 큰 테두리에 있어 왜려 간단해 진다. 고민 없이 답할 수 있다. 이 경우는 다르다. 문제 성향이, 색깔이 다른 경우다.
두 명 선배를 생각하면 측은한 마음이 앞선다. 더불어 인간의 원죄, 그토록 증오하고 싶던 '죄의식'에 까지 이르러, 나는 인간 본연의 존재를 존재론적 불행이라는 안타까운 심경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쾌의 반인, 사랑의 반신. 그런 자유에 대한 조망과 조명은, 언제나 사람들 주위를 공전하는 공리적 쾌다. 본래적 인간의 욕구라면, 사람은 언제나 메마른 광야를 거닐고 있는 것이다, 그것의 소유를 향해. 이해관계에 얽힌 지엽적 쾌의 대립은, 주변인을 붕괴시키고 만다. 어쩔 수 없다. 소찬한 인간이 해결할 수 없다. 신 조차, 그것은 본래적 본래성을 위해 눈을 빼어 놓는다.
커피숍에 도착했다. 창밖은 무거운 공기를 담고 있다. 금방이라도 비를 토해낼 것 같았다. 주변은 시끄럽다. 쾌의 집합이, 어떤 사유를 향해 매몰차게 돌진하는 대사다. 감았던 눈이 커지자, 발을 들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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