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꿈의 기록] 우리 삶은 어쩌면, 거대한 '환영'일지도 모른다 본문

Essays

[꿈의 기록] 우리 삶은 어쩌면, 거대한 '환영'일지도 모른다

스티붕이 2020. 1. 14. 23:45
꿈에 관한 기록, 프롤로그

 

학교 도서관.

 

한 남학생이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면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입 꼬리를 비죽거리고 있다. ‘재미있는걸 보나?’ 웃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남학생은, 급기야 뭉개진 얼굴 사이로 콧바람을 “푹” 하고 내뿜는다. 나는 필시, 스마트폰을 통해서 예능 영상 한 편을 보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저 남학생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어떤 중력의 세계에 속해 있는지도 까먹은 채, 영상이 구현한 이야기 세계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 있는 중이다. ‘꿈을 꾸는 것과 영상을 보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꿈은 가짜고 영상은 진짤까?’ 나는 그 순간, 새벽녘에 꾼 사실적인 꿈을 떠올리면서, 꿈과 영상의 차이점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했다.

 

꿈은 눈을 감은 채 어떤 장면을 보는 행위다.
반면 영상은 눈을 뜬 채 어떤 장면을 보는 행위다.

 

또한 꿈은 일련의 장면들을 꿈을 꾸는 주체의 시점에서 직접 체험한다고 간주하는 것이라면, 영상은 일련의 장면들을 타자의 시점에서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게임으로 치면, 꿈은 ‘배틀 그라운드’와 같이 FPS(First Person Shooter) 시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격이라면, 영상은 ‘심즈’와 같이 아이소매트릭(Isometric View) 시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격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꿈과 영상은 하나의 신체활동 안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두 가지 차이는, 한 사람의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시냅스의 전기 자극 등에 의한 비 물리적 환영을 ‘봄’으로 ‘착각’하는 것으로써 일치되기도 하는데, 그렇게 발전시켜본다면, 꿈과 영상은 대상을 바라보는 직접체험과 간접체험의 시점 차이라는 부분만 벗어나게 될 때, 본질적으로 동일한 두뇌의 경험에 속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영상이 꿈 보다 사실에 가깝다고 주장할 근거는, 공교롭게도 빈약한 편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비약이 아니다. 앨런 튜링이 묘사한 것처럼, “식은 오트밀 죽”처럼 생긴 우리의 두뇌는, 연접마디와 수상돌기 사이의 시냅스 간격을 통하여, 0과 1과 같은 컴퓨터의 아스키코드와 같이 나트륨과 칼륨을 안팎으로 여닫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눈을 통해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행위는, 시각피질과 측두부 하부에서 처리된 나트륨과 칼륨 따위의 신경신호가, 전하에 의해 전도된 신경섬유를 따라 움직인 정보처리의 결과를 ‘보았다’고 지각해 버리는 것뿐이다. 

 

만약 신경섬유가 정보를 정상적으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눈을 뜨고도 대상을 정상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시맹이나, 반대로 눈을 감고도 대상을 정상적으로 지각할 수 있다고 믿는 시맹부인(blindness denial) 등의 현상을 겪을 수도 있다.

 

따라서 눈앞의 물성을 오감을 동원해 입체적으로 지각하는 것이 아닌, 평면적인 스크린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각하는 오늘날의 영상시청 행위는, 꿈을 통한 지각 행위보다 우위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꿈이 영상보다 열등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안타깝게도 부족하다. 꿈이든 영상이든 간에 어떤 것을 본다는 것은, 연접마디와 수상돌기가 처리하는 시냅스의 두뇌작용일 뿐이다. 두 가지는 동일한 행위에서 단일하게 정박된다.

 

나는 지금도 혼자만의 세계에 속한 채, 입 꼬리를 연신 비죽거리고 있는 건너편 남학생을 바라다보면서, 그가 몰입하고 있는 스크린의 입자들이, 꿈이라는 환영과 본질적으로 같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여, 어쩌면 우리가 천착하고 있는 작금의 페이스북이며 유튜브 등을 통한 영상시청 행태와 콘텐츠 등이, 과거의 사적인(폐쇄된) 꿈 속 장면을 전자적 커뮤니케이션 도구에 의해 꿈 밖, 다시 말해 공적인(개방된) 스크린 위로 재-전유 시킨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컨대 꿈과 환영 또한 메시지였다면, 미디어의 확장은 곧 꿈의 확장과도 같은 셈이라는 뜻이다. 꿈의 발전이 그림이고, 꿈과 그림의 발전이 영상이며, 꿈과 그림 그리고 영상 등의 발전이 증강현실과 홀로그램 등이라고 추측을 하면, 얼마 전 구글이 새롭게 내세운 가상현실 플랫폼의 이름을 ‘Day Dream’, 즉 백일몽이라고 지은 것 또한 우연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니, 꿈도 환이고 영상도 환이며, 현실 또한 환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도달했다. 잠시 기지개를 켰다. 등 뒤로 “대출 불가”라는 새빨간 글씨와 함께 “교수 저서”라고 명시 된 책장이 눈 앞에 들어왔다. 나는 자리에서 성큼 일어나, 국문과 고 마광수 교수가 쓴 <생각>이라는 책을 집어 들고는, 연신 비죽거리고 있는 남학생을 한두 번 올려다본 다음에, 손에 쥔 책장을 재빠르게 넘기면서, 3월의 정오가 주고 있는 한가로운 ‘생각의 권태’를 잠깐 동안 대신해 보려했다.

 

“우리는 운명의 실체를 직시하지 말고 우회적으로 바라보면서, 그때그때의 고달픔을 환상적 착각 속에 다 묻어 두는 것이 좋다. 말하자면 끊임없이 ‘백일몽’을 꿈꾸는 자세로 인생을 살아나가는 것인데,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다 보면 자신이 어느새 낭만주의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고, ‘철부지 낭만주의자’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마광수, <생각>, PP. 177~177).”

 

한 대목이 눈에 들어와 마음을 붙잡았다. 우리 삶은 거대한 환영이다. 현실 또한 꿈일 지도 모르겠다고 여겨보니, 환갑이 지난 돈키호테처럼 ‘철부지 낭만주의자’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확’하고 일어났다. 까짓것. 이렇게 아둥바둥 다투면서 살아갈 바에야, 그저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이나 우회적으로 내려다보면서 히죽거리고 있는 저 남학생이, 작금은 나보다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고 있었던 것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