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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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researchs/Artist notes

Panopticon

스티붕이 2010. 5. 30. 23:45

Headwork_a panopticon in the net, neo-panopticon
벤담의 설계도가 선택됐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후대는, 판옵티콘을 벤담의 그것으로 회자시키고 있다. 공리라는 다소 궤변적 논리 위에, 인격이 훼손 된 그의 감옥 설계는 집요하면서 정교하다. 시대가 요구했던 그것은, 감시와 순응 또 숭고에 대한 인과론적 담론을 기묘하게 형성시킨다.

경찰서 근처도 가 본적 없는 내가 남대문서에 불려갔다. 회사 사태 때문이다. 경찰, 검찰 등의 조사는 표면적으로 위협적이지 않았다. 현안에 대한 답과 반성이 있다면 수사는 순조로운 수순을 밟을 터였다. 그러나 속내는 뒤틀려있었다. 그들 위협은 표상 적이지 않았지만, 대자 신념을 유린 할 만큼 강한 것이었다. 이따금 어둠에 찬 복도를 걸어갈 때면, 시대를 관통하는 권력의 감시, 처벌에 대한 기운이 오롯이 상기됐다. 유치장과 구치소를 오가던 선배를 바라볼 때는, 뒤틀린 역사의 항변을 보는 것도 같았다. 공권력 앞 무기력 존재는, 인간의 실존을 손쉽게 불투명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런 언저리,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 그림이었다. 남대문서 유치장 면회소의 벽면, 조악한 볼펜 자국이 알 수 없는 선들로 도안(상단의 이미지는 당시 사진)
을 그려놓고 있었다. 수감됐던 적 있던 한 선배는, 유치장 구조도라 했다. 그것은 부채꼴로 휜 격실과 그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감시탑으로, 여지없는 벤담의 판옵티콘과 닮은꼴을 하고 있었다.

한 관리가 수감인 전원을 감시하는 구조는, 기본적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상관에 놓여있다. 그것은 지배가 피지배를, 또 신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을 종속시키는 구조와 닮은 상태다. 과거 벤담의 설계가 오늘까지 현존해 있다는 사실은, 유용에 대한 것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권력 스스로의 진화다. 

정보와 수집, 감시당하는 세계. 사고나 해석 등의 유기물은 여지없이 네트워크 내 편입 돼, 신격 된 권력의 절대적 시스템에 결박 돼 있다. 시력 잃은 대중 대부분은, 스스로의 의지로 인해 그가 준 편의의 재단 앞에 자신 동공을 수줍게 내 놓는다. 현시는 어떤 것으로도 보완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공 잃은 대중은 스스로의 구원과 현시 복원을 위해 또 다른 절대자의 등장을 요원히 갈급하고 있는 것이다.

불편한 진실이 던져주는 것은 어색한 몸놀림이다. 자생하고 있던 권력 네트워크는 이도저도 다르지 않은 또 다른 잔여를 던져다 준다. 거짓 대안의 그것은 절대의 소멸 된 복제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양손 들어 새 권력에 합장한다. 경배를 한다. 벤담의 네오 판옵티콘은 거기에 있다. 
언제부턴가 네트워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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