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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researchs/2014 : Paik Orwell

Paik Orwell Club: 백남준 이후의 1984, 텔레비전과 상징사건

스티붕이 2014. 5. 11. 11:54

백남준 이후의 1984


발표 : 서정호 Media Artist

주관 : 백남준아트센터 2014년 4월 30일

링크 : <백-오웰 클럽 와레즈 아카데미>


1. <1984>인가?

 

사람 습성은 그렇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거나, 관심 있는 것에만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뉴스와 기사를 보더라도 눈에 띄는 것만 습독하려는 성향이 부지불식 깃들어있다. 언젠가 기사를 읽다가 중국의 사이버 검열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내용을 읽은 적 있다. 중국 당국이 강력한 인터넷 통제지침을 발효해 온라인상의 표현 자유를 강하게 억압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자가 뽑은 헤드라인이 흥미 있었다. <중국, 오웰의 소설 1984처럼 강력한 인터넷 통제지침 발효>였다. 기사에는, 오웰이 경고해 마지않았던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이 언급되어 있었다.

 

우리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공권력의 민간 사찰이 문제가 됐을 때, <계자와 메일을 사찰당하는 고통>이라든가, <오웰 식 어법으로 다시 보는 빅브라더 사회>의 기사에는 오웰에 대한 망령이 긴요하게 서술 되어 있었다. 또 정치 이슈를 넘어 문예계 기사에서도, 오웰에 대한 잔상은 낭중지추 도드라져 있었다. 예컨대 <1Q84 무라카미, 1984 오웰을 불러내다>, <1984에서 1Q84까지 빅브라더에 길들여진 리틀피플>,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매트릭스>, <브라질> 등에 이르기까지 오웰에 대한 언급은 문화예술 기사 전반에 걸쳐 다종다양하게 언급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근 서울대 중앙도서관 발표도 이목을 끌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의 하버드대학교 대학생 선호도서 100에 따르면, 1위로 오웰의 소설 <1984>가 차지했다고 발표를 했다. 이것은 동시대 지성에 의미하는 바가 큰 것으로, 작가 시각이 현대 지성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연장 돼 왔다는 것을 반증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발표는 서울대의 그것 이전에도 연이어 언급됐다. 예를 들어 2007년 가디언의 조사에 따르면, ‘20세기를 가장 잘 정의한 책’ 1위로 오웰의 <1984>가 차지했는가 하면, 2008년 뉴스위크 선정 ‘100대 명저에 오웰의 <1984>2위에 선정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의문이다. 왜 유독 <1984>인가? 현대사회가 디스토피아에 가깝다면,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자먀틴의 <우리들> 등을 언급하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꼭 오웰이다. 현대 사회가 오웰의 소설을 언급해 오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텍스트 등으로 구성되는 문장의 집합이라는 것으로만 규정할 수 없는 또 다른 의미가 형성 돼 있었기 때문이다. 상징성, 즉 알레고리적(allegorical) 함의가 그 이유다. 백남준은 1984년도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비디오 퍼포먼스를 통해 오웰의 그것을 내적 소재로 활용했던 바 있다. 백남준에게 있어 <1984>, 그 자체로 현대 사회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를 농축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짧고 강한 메시지는 매력적 소재가 된다. <1984>의 알레고리는 단순하다. 강하다. 그것은 기술발달이 인간 삶을 고통 속에 통제할 수 있다는 것과, 절대 권력이 전체주의 사회를 형성해 사람을 주야 감시하고 처벌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간단하게 그려내 준다. 그렇게 형성된 이미지는 피안 속 형상을 만들고 텍스트는 내적 혼령이 돼 곤고한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게 해 준다. 오웰의 <1984>,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현대 사회에 있어 하나의 알레고리가 돼 왔다. 그런 알레고리는 그 스스로 생장하고 성장해 현대사회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수 있게 해 주었다.

 

보이는 것만 보려는 습성은 이 시대 중요한 화두가 됐다. <1984> 출간 당시, 소설에 대한 평은 입장에 따라 엇갈렸다. 미국과 한국 등의 반공 국가에서는 반공산주의 소설로 둔갑 돼 환영을 받았는가 하면, 일부 유럽국가와 러시아 등에서는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소설로 보고 강하게 비판했었다. 그러나 오웰은, 소설 내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비유는 러시아와 공산 국가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공산권 국가가 붕괴한 이후에는 어떤가?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오웰의 <1984>는 그 인기가 식을 줄 모르고 상종 중에 있다. 오히려 반공시절 보다 더 많은 이유로 사회 저변서 인용 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오웰은 친자본주의자도 아니었고 친사회주의자도 아니었다. 따지자면 무정부주의자에 가까웠고 생태적 사회주의자에 가깝기도 했다. 또한 자신 나라를 사랑했던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같이 작가 스스로에 대한 이념 규정이 다채로웠기에, 소설 해석에서도 독자에 따라 그 판단은 모호한 구석을 담아내고도 있다. 따라서 어떤 의미로 오웰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의 정치적 견해를 파악하려는 행위이며, 동시대 역사성에 대한 관찰의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2. 백남준과 <굿모닝 미스터오웰>

 

우리에게 21세기는, 198411일부터 시작된다.”

 

백남준에 대한 평가와 연구는 몇 권의 책으로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본 지면이 백남준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1984년도 작 <굿모닝 미스터 오웰> 때문이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백남준의 비디오 퍼포먼스로 198411, 전 세계 주요도시에 위성으로 생중계 된 영상이다.

 

오웰 소설 <1984>는 테크놀로지가 발전된 근 미래를 그린다. 그 사회는 한 명의 절대자(Big Brother)에 의해 사회전체가 감시처벌받는 어두운 미래로 묘사되어 있다. <1984>의 사회는 발전된 테크놀로지가 절대자의 수족으로 등장을 하는데, 그것은 시스템의 일방적 존속을 위해 끔찍한 감시를 쉼 없이 계속하는 오싹한 도구로 그려져 있다.

 

방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쇠 생산과 관계되는 무언가 숫자로 이루어진 목록을 읽는 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뿌연 거울 같은 직사각형의 금속판에서 흘러나왔다. 금속판은 오른쪽 벽에 붙어 있었다. 윈스턴이 스위치를 돌리자 목소리는 약간 작아졌지만, 여전히 또렷하게 들렸다. ‘텔레스크린이라는 그 금속판은 소리를 줄일 수는 있어서 완전히 끌 수는 없게 되었다. 이 기계는 윈스턴이 내는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낱낱이 포착한다. 더욱이 그가 이 금속판의 시계 안에 들어 있는 한, 그의 일거일동은 다 보이고 들린다. 물론 언제 감시를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행하는지는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백남준은 오웰의 근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비디오아트라는 신기술로의 예술적 장을 열었던 그로서는 오웰에 대한 테크놀로지의 평가절하가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백남준은 오웰이 그리고 있는 <1984>에 테크놀로지의 향연을 계획해 내는데 그것이 바로 굿모닝 미스터오웰이라는 전대미문의 세계적 위성 퍼포먼스였던 것이다. 그 계획은 지금까지의 예술사적 지축을 흔들 만큼 크고 거대했다. 대륙을 넘고 우주를 넘는 기술 쇼였던 것이다. 백남준은 그것의 실현을 위해 아래와 같은 초안을 작성해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오래전부터 위성을 이용한 문화 이벤트는 있었지만, 이번처럼 비교적 적은 비용(1만 달러)으로 문화프로그램의 쌍방향 방송을 시도한 적은 드물다. 예를 들어 머스 커닝엄과 장 루이 바로가 유명한 듀오 춤을 추는 장면이 TV로 실시간 중계된다고 상상해보라. 오늘날 시몬 드 보부아르와 노먼 메일러가 실존주의적 문제에 대해 논의한다고 상상해보라. 혹은 오셉 보이스와 존 케이지의 듀오 퍼포먼스도 좋다. ‘하늘이 한계이다라는 표현은 이제 은유가 아니다. 대륙 간 위성중계를 이용하면 브로드웨이의 밤 공연에 드는 비용보다 더 적은 예산으로 두 대륙에 거주하는 수백만 인구만이 아니라 철의 장막 뒤에 있는 수백만 명과 접속할 수 있다. 동유럽 여러 국가에서 서구의 TV방송을 시청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굿모닝 미스터오웰>은 당시의 위성중계기술을 활용해 국경과 장벽 등으로 가로막힌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2,500만 명의 인구가 동시에 시청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의 비디오 퍼포먼스였다. 백남준에게 있어 동유럽 국가가 서구의 TV방송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기술이 이념적 분쟁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웰이 그리는 <1984>의 근 미래는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암막한 사회였다. 그러나 백남준에게 있어 기술발전의 미래는 음습하기보다는 희망차며, 테크놀로지가 갈등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요소로 활용될 수 있는 긍정적 사회였던 것이다. 백남준은 <굿모닝 미스터오웰>의 구체적 시나리오를 잡고 퍼포먼스의 구현을 위해 세밀한 구성을 준비해갔다.

 

백남준은 198411, 예술적 동료인 존 케이지와 요셉 보이스, 머스 커닝햄과 피터 가브리엘 그리고 이브 몽탕 등의 팝스타와 함께 파리와 뉴욕 등 세계 주요도시(8개 도시)를 잇는 실시간 위성 중계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 공연은 위성예술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에게도 비디오예술에서 위성예술로의 전향을 추동할 수 있게 해 준 의미 있는 공연이 되기도 했다.

 

백남준에게 있어 기술호황의 1980년대 초는 오웰의 1980년대와는 다른 세계로 나타났다. 그는 오웰의 그것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줄기차게 견지했다. 백남준은 <굿모닝 미스터오웰>을 통해 암울한 빅브라더의 전체주의 미래를 밝고 긍정적 기술지형의 현대로, 그리고 갈등이 치유되는 사회로 재해석해 냈던 것이다. 백남준의 플럭서스(Fluxus) 기치는 오웰의 보편적 알레고리마저 자신의 텃세로 탈바꿈시켰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텃세이지 세인의 보편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3. <1984> 이후의 <1984>

 

오웰 소설 <1984>는 전체주의 비판 소설이다. <1984>는 근 미래를 암울한 디스토피아 사회로 묘사시킨다.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들은 시스템에 속해 절대 권력의 수족 노릇을 수행하며 시민을 감시처벌한다. 빅브라더의 사회는 개인의 자유는 물론 남녀의 사랑까지도 권력의 폭거 하에 철저히 통제시켜나간다. 시민은 시스템의 체제유지를 위한 단순한 도구로 기능할 뿐, 어떤 인간적인 존엄도 수반되지 않은 채 일일을 건조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 기록되고 만다. 전대미문의 폭정사회를 살아가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오웰이 그렸던 빅브라더의 사회가 허황된 근 미래를 묘사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웰이 그렸던 사회는 동시대다. 냉전 종식 후 빅브라더의 사회는 사라졌어야 옳다. 그러나 오웰에 대한 언론의 기사 인용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오웰의 망령은 문예전반에 침투해 있다. 빅브라더의 사회가 단순히 공산체제를 비판해왔었다면 오웰의 그림자는 줄어들었어야 맞다. 전체주의는 스탈린, 무솔리니, 히틀러 등이 통치하는 폭정사회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들의 광풍이 휘몰아친 자리에는 자본과 체제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전체주의가 되살아나 있다. 어쩌면 가시적이지 않은 그것은 <1Q84>리틀피플형태로 존재해 세계 전반에 일찌감치 침범해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오웰의 <1984>는 문학적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그러나 거듭 재생산되는 그의 알레고리는 정명한 일련의 관념을 형성시킨다. 그것은 절대 권력과 개인의 말살 그리고 감시처벌 등에 대한 비판체계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련의 관념은 지면으로 표현될 경우는 텍스트체제로, 평면과 영상 등으로 표현될 경우에는 이미지체제로 일사분란하게 도출되어 나간다. 오웰이 만들었던 인식의 틀은 명징된 공리의 사유를 유발시키고 있다. 그 틀을 통해 만들어진 도출품은 설치작품과 영상 그리고 문학과 대중매체의 기사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오웰의 <1984>가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오웰의 <1984>가 형성시켰던 최초의 알레고리성은, 동시대 정명한 인식의 틀을 제조시켜 장구한 기간 동안 일관되게 추동될 수 있는 가치를 만들어놓았다. 멀지 않은 미래에 <1984>의 사회보다 더 심한 폭정의 세기가 도래한다면, 미래의 대중은 오웰의 알레고리를 통해 반발기재의 정념(affectif)’을 공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웰소설 <1984>가 가진 알레고리의 힘 때문이다.

 

서정호 작가의 작품은 세미나 당일 날 빔 프로젝터로 상영할 예정입니다. 지면 제시자료 .



텔레비전과 상징사건


발표 : 서정호 Media Artist

주관 : 백남준아트센터 2014년 4월 30일

링크 : <백-오웰 클럽 와레즈 아카데미>


1. 상징사건의 특징

 

1. 상징사건은 강렬한 인상을 받아야 한다.


2.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강렬한 인상은 크게 세 가지로 부터다. 첫 번째는 보는 것으로 부터다. 두 번째는 듣는 것으로 부터다 세 번째는 느끼는 것으로 부터다. 보는 것은 시각이다. 듣는 것은 청각이다. 느끼는 것은 감정이다.


3.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상징사건의 예는, 2008년에 있었던 <PD수첩>의 광우병관련 방송이다.


4. <PD수첩>의 원고는 글(logos)로 시작한다. 글을 뒷받침 하는 증거는 소리와 영상(ethos)이다. 글은 텍스트고 소리는 오디오다. 그리고 영상은 이미지다. 일반적으로 방송이 다른 것들에 비해 강렬한 인상을 주는 매체가 되는 이유는, 텍스트와 오디오 그리고 이미지가 함께 공명을 하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5. 인간이 공명을 느끼는 정도는, 자신의 쾌-불쾌 정도에 있다.


6. -불쾌를 느끼는 것은 관념을 통해서다. 관념은 외부의 자극에 의하여 몸에 개입된다.


7. 당시 <PD수첩>의 광우병 방송이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이유는 그것이 나와 가족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불쾌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징사건(symbolic event) 발생하는 지점이다.


8. 방송(logosethos의 공명)을 본 사람은 자신이 받은 정동적인 인상(affective impression)을 표현하기 위해 공론화된 장(public sphere)인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설득하기 위해 모였고 대상(지칭된 무형의 권력)과 투쟁하기 위해 연대했다. 모든 것은 개인의 몸(pathos)을 통해 이루어졌다. 정동사건(affective event)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9. 공감을 일으키기 위해 설득하거나 파괴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기질이다.


10. 모든 기질은 인간의 감각질(qualia)로부터 시작한다.



2. 상징사건의 사례

 

. 조지오웰의 코끼리

청년 시절, 오웰은 버마에서 제국주의 경찰로 근무했다. 오웰은 제국주의란 악한 것이고 그런 제국의 경찰 노릇을 하는 직업으로부터 서둘러 벗어날수록 좋은 일이라고 썼다. 버마에서 제국주의 경찰로 근무하던 어느 날, 오웰은 성난 코끼리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버마의 한 시장에 도착한 오웰은, 어느덧 얌전해진 코끼리를 바라보며 철수를 하려고 했는데, 그를 즉 제국주의 경찰을 둘러싼 버마인들의 눈빛으로부터 코끼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는 무언의 강압을 받고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게 된다. 오웰은 그런 상황에 빠진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토착민들의 분노 사이에 낌으로서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고 했다. 며칠 후 오웰은 5년 간 근무했던 제국주의 경찰의 옷을 벗고 본국으로 되돌아가 접시닦이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의 심경은 그의 책 <코끼리를 쏘다>에 기록됨으로서 문학적 사유로 반성을 시도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독가스

1995320. 일본 동경의 지하철에 독가스가 살포되었다. 그 유명한 옴 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살포사건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사건을 TV로 시청을 하면서, 믿을 수 없는 충격에 빠졌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문학에 있어서 커다란 터닝 포인트가 된 시점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르포르타주 기법의 소설인 <언더그라운드 I, II>를 집필하면서 옴 진리교 신자들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또한 하루키의 최근작인 <1Q84> 시리즈를 집필하는데 비판적 근간이 되기도 했던 사건이었다. 하루키는 <1Q84>에서 마크 스트랜트의 시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썼다.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며, 태양은 더 이상 태양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치명적인 단추 잘못 끼우기가 시작되었다.”세계의 대중은, 1984년이 아닌 의문투성이로의 1Q(Question)84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하루키는 밝혔다.

 

. 노무현의부림 사건

부산의 학림 사건이라고 불렸던 부림 사건은, 부산의 일반시민과 학생들을 불법 감금·고문하고 기소했던 5공의 대표적인 공안폭력 사건이다. 당시 부산의 평범한 세금전문 변호사로 일하고 있던 노무현은, 고시공부 시절 신세를 졌던 국밥집 아주머니의 아들이 부림 사건으로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듣고 스스로 사건을 맡는다. 이 변호를 계기로, 노무현은 부산의 세금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로 탈바꿈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에 대해재판을 맡고서부터 나의 이기적인 삶의 껍질이 균열되기 시작했다. 대공분실에 끌려가 무려 57일간이나 가족들에게 아무 연락도 못하고 짐승처럼 지내야 했던 청년들, 매를 얼마나 맞았던지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발톱이 새까맣게 죽어버린 몸을 내보이면서도 얼마나 고문에 시달렸던지 변호사마저도 정보기관의 첩자가 아닌지 눈치를 살피던 파리한 몰골의 청년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죽었던 가슴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3. 서정호의 <1984 Frame>

 

오웰의 디스토피아(dystopia) 소설인 <1984>에 대한 인용이 많다. 권력 집착이 강해지고 정보기술 등이 발전할수록 암울한 미래사회는 동시대 현대에 직 간접적으로 도드라지고 있다. 예를 들어 <조지오웰 식 어법으로 다시 보는 빅 브라더 사회>라는 신동아 기사를 살펴보면, 직장과 백화점 등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에 대해 미셀 푸코(Michel Foucault)감시와 처벌에 인용되는 파놉티콘(panopticon)을 걸쳐 오웰 소설 <1984>의 빅브라더(big brother)를 등장시킨다.

 

결국 현대인은 파놉티콘에 갇힌 죄수와 다름없게 되었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말이 60년 만에 전자정보기술의 발전으로 현실이 됐다. 현대인들은 고도의 전자정보기술에 의한 전자 감옥에 살고 있다. 각자에 대한 모든 것이 각자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기록되고 촬영되어 저장된다. 이런 감시를 빠져나갈 수 있는 영역은 거의 없다.

 

파놉티콘은 모두라는 의미의 'Pan'과 본다는 의미의 'Opticon'이 합쳐진 단어로,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이 설계한 후 영국정부에 공모했던 원형감옥을 가리킨다. 그것은 거대한 원형 감시탑 구조물의 형태로, 소수의 감시자가 암막에 위치해 다수의 범죄자를 감시하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벤담은 늘어나는 도심 범죄자를 적은 비용으로 감시하기 위해, 원형으로 이루어진 구조물 형태로 새로운 감옥을 설계했다.

 

파놉티콘은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누구인지와 무관하게, 권력의 상관관계를 창출해 내는 기계다. 중앙에 우뚝 솟은 감시탑 속 관찰자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둠에 숨어 외부를 관찰하는 것이다. 반면 바깥으로 감금된 자들은 그 스스로가 언제나 관찰자에게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구조는, 권력을 행사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 사이의 상관관계를 형성한다. 그것은 양자의 시선비대칭성을 형성하는데, 벤담 자신이 강조했던 '죄수들이 단지 감시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감시의 환영'을 창조한 극장이 되는 구조였다. 황석영 소설오래된 정원상권에는 벤담의 파놉티콘이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 돼 있다. 잠시 아래 글을 읽고 논의를 계속해 보자.

 

구치소에서는 저 유명한 벤담의 일망 감시시설을 본뜬 원형 칸막이가 운동공간이었다. 이 시설물은 수인 각자가 보여 지기만 할 뿐 남을 볼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벤담의 감옥은 원래 베르사유 동물원 시설에서 착상을 얻었다고 하는데, 가장 바깥쪽에 원형의 높고 긴 담을 둘러치고 케이크나 피자를 자르듯이 부채꼴 모양으로 칸을 나누었다. 각 칸막이마다 문이 달려 있어서 수인을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으면 그는 그냥 부채꼴의 시멘트 담 속에 혼자 갇힌다. 원형의 탑이 중앙에 있고 이것은 이층으로 되었다. 시설은 참으로 상징적이었다. 연구실의 쥐새끼들처럼 우리들의 맴도는 움직임은 적나라하다.”

 

푸코는감시와 처벌에서 벤담의 파놉티콘을 언급하며, “예방적 성격과 지속되는 기능 그리고 자동적 메커니즘에 의해 권력의 효율을 확보하는 면에서 효율적인 구조라고 썼다. 그리고 그 구조에 대해 인간을 통한 실험을 가능하게 하고, 사람들이 그들에게 가할 수 있는 변형들을 전적으로 분석하는데 특권적인 장소였다는 것도 덧붙였다.

 

오늘날 와서 전자정보 발달이 개인 삶을 침해하거나 훼손하는 경우, 푸코가 인용했던 파놉티콘과 오웰의 <1984>는 단골로 인용되는 알레고리다. 보이지 않는 사이버상의 감시자는 파놉티콘의 원형감시탑에 거주를 하며, 그곳에 숨은 권력은 <1984>의 빅브라더로 지칭되는 것이다. 발달된 정보망은 권력자들에 의해 개인의 정보가 습관적으로 수집되는가 하면, 기업은 물론 언론 등에 이르기까지 정보의 수집을 전 방위적으로 확산해 내고 있다.

 

소설 <1984>가 출판 된지 60년이 넘었지만, 그것에 대한 영향력은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정보기술의 발달은 오웰이 예측한 디스토피아를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오웰 생전에는 실현 될 수 없던 일이, 기술발전을 토대로 실상 내 구체적 형태로 나타나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권력이 있다. 권력은 기본적으로 체제를 유지존속 시키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계층과 체제를 와해시키려는 세력들 간 적지 않은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서정호 작가의 <1984 Frame> 시리즈는, <1984>가 가지고 있는 정치·사회적 알레고리를 통하여 작가의 삶으로부터 파생되는 권력의 잔흔들을 수집해 예술적으로 재해석 한다. 왜냐하면 작가는, 그런 행위가 앞으로의 인류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반성적으로 사유시킬 수 있는 방법이 된다고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84 Frame>은 그와 같은 몸부림의 증거일 뿐, 단순히 작품만으로 단정되기를 거부하고 있다발표자료 끝.


관련 링크 백남준 아트센터 백-오웰 클럽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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