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보수와 진보의 가치 본문
일절. 나는 당신으로 존재한다.
보수의 가치와 진보의 가치. 둘은 호혜적이다. 하나의 양상만으로 '그 하나'를 규정지을 수 없다. 불가능하다. 기존의 것을 유지시키고자하는 사고와 기존의 것을 해체시키고자하는 사고. 둘은 다른 하나의 존재로 인해 '그 하나'가 규정을 당한다. 즉 정박되는 것이다. 따라서 둘은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필요충분과 같은 변수로서가 아닌 필연적인 상수로서 존재한다. 어떤 것을 유지시키려는 캐노니컬한 보수의 가치와 무엇을 해체시키려는 언-캐노니컬한 진보의 가치는 이항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모든 역사, 에너지 그리고 생명은 기본적으로 그와 같은 알고리듬으로 짜여져 있다. 지엽적인 사례 하나로 미국의 영화발전 가운데 일부만 살펴보자.
‘뉴아메리칸시네마’는 196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한 실험영상을 말한다. 이 영상은 기존의 할리우드식 영화에 반대를 하는 시네마로서, 1960년 9월 ‘뉴아메리칸시네마그룹’으로부터 출발을 했다. 배우와 극작가 등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냉전의 매카시즘 광풍 등으로 인한 영화의 검열을 반대했고, 기존의 거대 배급망 체제를 비판했다.
‘뉴아메리칸시네마’의 대표작으로 일컬을 수 있는 영화 <그림자들>은 약 4만 달러라는 저예산의 비용을 들여 자유로운 형식, 카메라 핸드헬드와 클로즈업 쇼트 그리고 시나리오 없는 즉흥연기 등의 전위적인 기법을 활용해 영화를 제작했다. 영화 <그림자들>은 미국의 독립영화를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빛났다. 뉴욕을 중심으로한 이들의 영화제작 방식은, 그러나 할리우드식 제작시스템의 물량공세와 상업영화와의 경쟁 등으로 쇠퇴해갔다.
그러나 이들 '뉴아메리칸시네마그룹'의 도전적인 실험정신이 세인의 냉대를 받으며 쓸모없이 사라졌던 것 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의 영화제작 방식과 기법 등은 할리우드의 상업영화 제작 현장으로 발빠르게 스며들어, 영화의 새로운 기법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재로 작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1967년 작 <졸업>과 1969년 작 <이지 라이더> 등은 ‘뉴아메리칸시네마그룹’의 제작방식을 차용해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와는 차별화된 기법으로 제작되어진 영화들이다. 이들 영화는 화면의 구성을 보다 전위적이고 실험적으로 구성시키기도 했으며, 시공간의 연속성을 의도적으로 파괴시키기도 했다. '뉴아메리칸시네마'를 계승한 그와 같은 스타일은 후에 '뉴할리우드시네마'라는 이름으로 지칭되어 세계 영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발전의 동력이다. 시스템은 형질의 보존이다. 둘은 같은 껍질 아래 살면서 앞으로 진일보한다. 태양계는 고정된 태양을 중점으로 해서 나머지 행성들이 원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틀린 설명이다. 태양계는 시속 7만 여 킬로미터의 속도로 우주를 향해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히 설명을 하면, 태양과 그의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한 고정된 회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 태양계 자체가 우주를 항해하는 사인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태양계를 존속시키는 힘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형질을 보전시키려는 코스모스한 힘과 다른 하나는 형질을 해체시키려는 카오스한 힘이다. 두 가지 힘은 파르메니데스의 '영원'과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라는 것으로 유비될 수 있으며, 둘의 지향은 양자적인 스핀으로 구성되는 만물의 기본 형질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둘 가운데 어느 하나의 소멸을 뜻하지 않는다. 그의 책 <정신현상학>에는 비(非)와 부(不)가 많이 등장을 하는데, 이는 합리(rational)의 어원이 되는 'RATIO'를 비(非)하는 것으로서 고착을 깨뜨린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변증법적 합리라는 것은 단단하게 고착된(these) 것을 깨뜨리고(antithese) 옳바르게(synthese) 분배(RATIO)한다는 것을 그 어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생명들은 진보와 보수의 가치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조물주가 만든 생명의 필연이며 생장의 기초다. 우리는 서로를 적대시하며 불신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행동은 삶을 부정하는 행위며 생장을 잃는 행위가 된다. 전체와 부분, 영원과 변화, 외시와 내포, 겉과 속, 형태와 의미. 당신이 속한 세계는 다른 세계의 가치로서 존중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보수와 진보의 이항대립적 필연성이다.
보수에게는 보수의 가치가 있다. 즉 형질을 '보존'하려는 가치다. 진보에게는 진보의 가치가 있다. 즉 형질을 '변화'시켜려는 가치다. 일찍이 파르메니데스는 형질이 보존되는 가치에 대해, "강물은 강물 그 자체로 고유하다."는 영원성을 주장했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형질이 변화되는 가치에 대해, "우리는 단 한 번도 같은 강물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는 것으로 변화성을 주장했다. 보수의 영원과 진보의 변화, 두 가지 가치는 우주의 필수불가결한 상수로 존재한다. 따라서 두 가지 가치는, 때로는 적대적이기는 하나 근본적으로는 호혜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왜냐하면 호혜적이면서 적대적인 친족-갈등구조는, 우주의 생명체을 움직이는 근본원리인 '에네르게이아'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적대시할 수 없다. 척이 없다는 것은 공간(쯔뷔센)이 없다는 의미며, 공간이 없다는 것은 형질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는 당신으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절. 사물의 마음
오전 산책 길에, 동이 트는 것을 보았다. 붉은 태양이 뜨고 있다. 하늘은 파랗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저 태양은 같은 하늘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자, 존재의 '본질(subjectum, 주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래로 던져진 것'이라고 한다. 영어 'substance'의 어원이 된다.)'과 '속성(objectum, 대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앞으로 던져진 것'이라고 한다. 대상은 보고 듣고 만지는 것으로서만 파악할 수 있다. 미학용어 '오브제'로 활용되기도 한다.)'에 관한 사고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태양과 하늘은 각각 본질과 속성을 가지고 있다. 본질과 본질의 만남은 길다. 태양이 하늘을 만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태양계가 사라지지 않는 한은 계속 될 것이다. 그렇지만 속성과 속성의 만남은 조금 다르다. 오늘의 속성과 내일의 속성은, 태양과 하늘의 성장이나 기후 등에 따라 계속해서 달라진다. 그렇게 보자면, 어제의 태양과 오늘의 태양은 같은 하늘 위에서 만난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짧다. 본질과 본질의 만남에 비해 일 분 일 초의 시각대 별도 다른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만남을 추구하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본질과 본질의 만남을 바라보게 된다면. 태양이라는 본질과 하늘이라는 본질은 서로 만나지 않을 확률이 극히 적다. 오늘도 태양이 떠오르지만, 내일도 태양은 떠오를 것이다. 그렇게 추론할 수 있다. 반면 속성과 속성의 만남을 바라보게 된다면, 오늘과 내일의 만남은 같을 수 없다. 저 태양은 본질적으로는 같은 하늘과 만날 확률이 속성적으로 만날 확률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높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본질은 실존적이고 속성은 환경적이다. 실존은 생명이 끝날 때까지 연속되나, 환경은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관찰자의 시각은, 본질을 관조하는지 속성을 관찰하는지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만약 사물의 본질이 다른 사물의 속성과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그와 같은 시각의 차별은 갈등을 수반한다. 본질은 보다 오래되고 먼 것을 얘기하는 반면, 속성은 눈 앞의 것을 얘기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각은 시간의 차이를 낳고 시간은 크기의 차이를 낳는다. 멀리 보는 것은 좁게 보는 것 보다 상대적으로 크고 과감하며, 좁게 보는 것은 멀리 보는 것 보다 상대적으로 작고 섬세하다.
모든 사물은 본질과 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속성은 눈에 보인다. 본질은 사물의 존재를 규정하고, 속성은 존재의 생성을 규정한다. 본질은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실존을 추구하며, 속성은 지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존을 추구한다. 즉 실존 한다는 것은 그런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사물의 상태를, 생존은 이런 상태로 되어야 한다는 사물의 양태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질은 보수적이고 느리며 눈 밖의 것을 추구한다. 반대로 속성은 진보적이고 빠르며 눈 앞의 것을 추구한다. 두 가지 성질은, 사물의 존재를 규정짓는 두 가지 요소가 된다.
인간도 그렇다. 인간을 사물로 대치시킨다면, 인간의 영혼은 본질을 나타내고 육체는 속성을 나타낸다. 두 가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진동(oscillation)'으로 인하여 현상과의 대면을 발생시킨다. '나'라는 존재는, 이 우주 속 유일무이한 본질로서 실존하고 있으면서도, 타자와의 끊임없는 교차 속에서 생성되고 있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나타내며 생존의 기본적인 교감의 '결'을 이루어내는 것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결이란, 나의 본질과 속성의 끊임없는 진통을 통한 내면적 무늬임과 동시에 타자들과의 끊임없는 진동을 통한 외면적 흔적이기도 하다.
인간이란, 홀로 고독하게 존재하면서도 사회적 관계를 통하여 거버넌스과 커뮤니티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등을 이뤄내야만 하는 존재다. 그것은 속성을 내포하고 있는 모든 생명의 기본적인 본질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물이든,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는 것은 생명의 공속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방증시킨다.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 추구하는 것은 현실과 사실성을 거부시킨다. 하나의 사물이란, 큰 것과 작은 것 그리고 먼 것과 가까운 것 등의 엇갈린 조화로서 하나의 덩어리(몸체) 안에 기거를 한다. 그와같은 서로 다른 성질은, 하나의 생명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동인이 된다. 활동이 된다. 움직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엇갈린 갈등이란, 우주의 본질적인 '방향'이자 당연한 '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