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형태와 의미 본문
내가 나로 존재하는 것, 내가 나로 발현되는 것은 형태의 연속성 때문이다. 형태의 연속성은 의미의 연속성과 호혜관계를 이룬다. 의미가 연속되는 것은 내가 나로 존재하는 것을 유발시키고 항구성을 지속시킨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모래도 나의 '모양'으로 나를 추구해야 된다. 헬라스 철학에 따르면 형태는 형상으로 의미는 질료로 볼 수 있다. 플라톤은 진리, 즉 아르케가 형상에 있다고 보았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르케란 질료에 있다고 보았다. 형태와 의미는 서로를 수반한다. 그렇지만 진리란 어느 한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기능(dike)을 의미로 볼 때, 시카고의 오디토리엄 빌딩을 건축했던 건축가 루이스설리번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것으로 형상의 중요성에 방점을 두었다. 기능 중심주의 시대에 들어서는 외형의 추구가 당연한 흐름이었다. 그러나 형태는 기능 속으로 숨어들고 모든 것은 표피를 분절화 즉 패킷화 시켰다. 본격적인 사이버시대에 들어서는 기능이 형태를 반향시키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고 하드웨어는 소프트웨어 속으로 숨어들었다. 모바일의 버튼은 스마트폰의 스크린 속으로 숨어들었으며 콘텐츠는 분절화 되어 온라인 어플리케이션 내로 들어갔다.
형태(시니피앙)의 연속은 주체를 발현시킨다. 발현은 의미(시니피에)를 추구해내고 의미는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의 모습은 그런 상태다. 겉은 신체의 완전성을 추구하면서도 내용은 진리를 찾기위해 동분서주한다. 치장의 사치와 지식의 허영은 인간이 가진 두 가지 조건의 부담스러운 시선이다. 그렇지만 그 둘을 인간은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연속성을 가지면서 그러한 결여를 추구해갈 뿐인 것이다.
프란츠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살펴보자. 형태의 단절 예.
일절.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리 잠자의 변형. 내가 나였다는 것에서부터 이탈 됨. 언제나 내가 나 일 것 같았던 상태에서 단절됨으로서 내가 나일 수 없을 경우도 있다는 것을 각성시킴. 그것은 언제나 살아있을 수 없다는 ‘메멘토 모리’를 상기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절. 여자가 있다.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자신의 얼굴을 반영시킨다. 스마트폰의 캠을 통해 보여지는 자신의 모습은 만족스럽다. 예쁘게 화장도 되어있고 표정도 밝다. 그렇지만 스마트폰을 벗어난 그녀의 모습은, 곧바로 삶에 찌들어진 채 암울한 표정으로 돌변해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다만 차창의 거울 속에 반사된 타자의 눈을 통해서만 그녀의 이전과 이후가 반추될 뿐이다.
삼절. 그레고리 잠자는 벌레가 되었다. 언제나 어제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은 일순간에 무너졌다.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꿈이 아니다. 잠자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갖은 변명을 가져다 붙이지만,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형태의 변형이 정신의 변용으로 바뀌어 잠자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를 관찰하는 그의 누이는, 잠자의 몸에다 사과를 던져버림으로서 남매의 정을 부정하기까지 한다. 단절된 형태의 연속은, 내외의 공격에 의해 죽음을 부르고 잠자는 죽음으로 생명을 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