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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Fugitive essays

진짜와 가짜 메시지

스티붕이 2012. 10. 24. 13:15


진짜와 가짜 메시지


회사의 해직기자인 조 선배가 마라톤을 했다. 101km를 뛰었다고 한다. 나는 대뜸 “그렇게 뛰었다면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조 선배는 내 말에 쓴 웃음을 지으면서, “100킬로미터를 뛰는데 재미가 있겠니?”하고 핀잔을 준다. 그 말에 나는, “그래도 뭔가 도파민의 분비와 같은 쾌가 있어서 뛰는 것 아닌가요?”하고 되물었다. 조 선배는 말했다. “아니, 내가 그 먼 거리를 마라톤으로 완주했던 이유는 ‘YTN 사장’ 때문이야. 내가 단순히 ‘YTN 사장은 물러나시오.’하고 외치는 것과 백여 킬로미터를 넘게 뛰고 ‘물러나시오.’라고 외치는 것 가운데 어떤 발언 쪽이 더 무게가 있을까?”


중국의 다큐멘터리를 봤다. 제목은 <High tech, Low life>라는 것으로서 번역하자면 ‘상류기술과 하류인생’이라는 의미다. 다큐에 등장하는 인물은 중국의 소시민이다. 그는 낡은 자전거를 타고 중국 전역을 누빈다. 그러면서 디지털 카메라와 노트북 등을 이용해 현지의 일상을 네트워크 내에 올린다. 그렇게 올리는 내용은 주로 중국 사회의 고발에 대한 것으로서, 공안의 감시를 불철주야 받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초로의 그는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한 도에 들어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의 한 성에 들어왔다. 이곳의 인구는 7천만 명이다. 그런데 기자가 한 명도 없다.” 그는 도시와 시골의 산간벽촌을 누비며, 오늘날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부조리한 사건을 촬영하고 기록한다. 그러면서 단 한 명의 기자가 없는 현지의 세태를 비판하며 그 스스로가 기자가 되기를 자청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일련의 디지털 기기와 낡아빠진 자전거 한 대 뿐. 그야말로 하류인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가 말이다. 그렇지만 그는 상류기술로서 중국의 부패한 현실을 고발하는 증인으로 현지의 이곳저곳을 '직접' 누빈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체현(embodiment)이라는 것이 있다. 체현은 주체와 대상이 일치하는 것으로서, 대상과 주체가 상쇄한 지점에 새롭게 발생하게 되는 제 삼의 주체-대상이다. 그것은 주체가 대상에 몰입하게 됨으로서 발생하게 되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정원의 정원사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정원사가 있다. 그녀는 정원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정원 자체가 자신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정원을 보면 그녀가 보이고 그녀를 보면 정원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일치는 주체가 대상에 대해 과하게 몰입한 경우 발생하게 되는 것으로서, 주체와 대상의 이원론적 구분이 무의미해지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상태를 주체가 대상에 대해 체현해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미란, 그와 같은 주체-대상 사이의 갈등, 분노, 반목과 고집 등이 아닌 어울림의 조화를 통해서 생성되게 되는 것으로서, 미적 숭고함의 발원이 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 따르자면, 인간은 덕(arete)의 실현을 통해서 쾌를 추구하게 된다고 말한다. 덕이란 인간만이 가지게 되는 것으로서, 사람다움(dike)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답다는 것은 다름 아닌 이타성에 관한 발현이다. 이타성은 타자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감정을 맞추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이타심의 자세인 것이다. 그러한 소통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렉시스(lexis)’라는 것으로 규정을 했다. ‘렉시스’는 ‘레고(lego)’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기본적으로 소통을 통한 설득을 의미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느낀 감정에 대해 타자와 공감하기를 바란다. 타자는 발신자의 의도를 느끼고 귀담아 기울일 준비를 해야 하는 것으로서,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에 관한 중요한 대상이 되는 요소가 된다. 만약 수신과 발신에 관한 양상이 불통이라는 벽에 가로막히게 된다면, 인간은 심각한 집단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만다.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고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것은 기본적인 인간의 자세가 아니다. 덕의 실현을 내세울 수도 없으며, 타자의 표현(미메시스)을 공감하려는 쾌도 수반될 수 없게 되고 만다. 암막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느낀 감정을 타자와 공유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이야기에 솔직해야한다. 읽고 읽히는 정보가 난무하는 세계에, 양질의 감정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알곡의 진실을 수반해야만 하는 것이다. 거짓과 암약으로 무장된 발신자의 코드는, 인간의 사회에 있어서는 암적인 부산물이 된다. 그러한 거짓은 쭉정이에 불과하며 머지않은 시기에 고사되고 마는 것들이다. 우리는 오성(five senses)을 통해 대상을 관찰한다. 그와 같은 관찰행위는 비유하자면 눈을 통해 눈 너머의 것을 보려는 시도라고 표현할 수 있다. 진실이란 눈앞의 것에 머물지 않고 대상 뒤로 숨는다. 은닉된 진실은 외시(denotation)에 흔적을 남긴 채 내포(connotation) 뒤에 머물러있게 되는 것이다.


눈앞에 두 명의 조 선배가 있다. 한 명은 ‘해직자 복직’이라는 조끼를 입고 지난 4년 간 수 백여 킬로미터를 뛰어온 조 선배다. 또 다른 한 명은 말과 구호로만 ‘해직자 복직’을 외친 조 선배다. 우리는 두 명의 조 선배 가운데 어떤 사람의 말에 보다 신뢰를 가질 수 있을까? 발신자의 설득행위는 주체의 체현이 수반되는 부위에 머문다. 그곳은 미적 숭고함이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곳이다. 수천 킬로미터를 자전거로 누비며 중국 전역의 부패를 고발하는 한 명의 중국인. 그가 던지는 조그만 메시지가 전 세계적으로 공감의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의 말 하나하나에 진중한 무게가, 사실적으로 내포되어있을 것이라는 진정성 때문이다. 진짜는 살고 가짜는 죽는다. 주체와 대상은 고집을 꺾고 메시지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것은 소리가 되고 그림이 된다. 글자가 된다. 진짜와 가짜는 그곳에 머물러 있다. '나'의 메시지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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