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1984의 테크놀로지 - '텔레스크린'의 시대로 본문
<1984>의 테크놀로지
- '싸이'와 '빅브라더'
가수 싸이가 열풍이다. 한국의 작은 거인이 세계무대 위로 성큼 올라선 느낌이다. 세계 도처는 싸이의 말 춤을 흉내 내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가사를 스스럼없이 따라 부르기도 한다. 조그만 땅에서, 한국 가수가 전 세계 문화지평을 호령하는 것 같아,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으로서 가슴 벅찬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싸이의 인기가 고공행진을 하다 보니, 그 열풍을 진단하려는 움직임 역시 적지 않다. 문화예술계 전문가들은 물론, 퇴근 후 맥주 한 잔 걸치는 직장인들의 안줏거리 코멘터리까지. 세계인들이 보내는 그에 관한 팬텀현상은 해석에 관한 흥미로도 우리에게 재밋거리를 안겨주고 있다. 소위 ‘싸이 열풍’에 관한 일반적인 진단으로서는, 첫째가 중독성 강한 리드미컬의 오디오를 들 수 있고, 둘째가 저급문화를 지향하는 비주얼의 흥미 그리고 세 번째가 유튜브라는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한 전략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음원의 오픈소스라던가 소속사의 진안한 마케팅 등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굳이 꼽아낸다면 상기의 세 요소가 그 열풍을 일으켰던 공명지가 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그 가운데서도 또다시 가장 중요한 요소 하나만을 반추해 낸다면, 그것은 바로 온라인 플랫폼 가운데 하나인 유튜브를 활용한 전략을 꼽을 수 있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그 열풍을 일으키기 전, 유튜브는 이미 거대 연예기획사들의 전략적 플랫폼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들은 자사의 공식채널을 개설시켜 일회적으로 소비되던 방송영상을 취합해 놓는가 하면, 소속 가수들의 일상과 안무연습 등에 이르기까지 기존 방송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창적 콘텐츠를 능동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와 같은 적극적인 콘텐츠 제공전략은 유튜브라는 강력한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에 힘입어 국지적 한계를 손쉽게 벗어나게 만들었다. 또 기존 방송사업자들이 할 수 없었던 글로벌 콘텐츠로의 도약도 가능하게 함으로서 대안 매체로서의 역할까지도 충실하게 수행토록 했다. 그런 연유에서 보자면 싸이의 열풍은 그 전조가 이전부터 예고될 수 있는 성격의 형태로서, 비약적으로 표현하자면 ‘싸이 열풍’은 곧바로 ‘유튜브 열풍’이라고도 대치시킬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전 세계는 온라인 플랫폼 경쟁 속에 들어가 있다. 변화를 인지했던 세계의 IT사업자들은 그들만의 공간을 구축시켜 온라인 사용자들의 구미를 사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유튜브의 성공적인 도약은, 그와 같은 경쟁체제 내의 환경변화와 크게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유튜브의 모체가 되고 있는 구글의 ‘통합 플랫폼 전략’을 들여다보면 알게 되는 것으로서, 경쟁력 있는 신생 플랫폼을 대거 인수해 단일 아이덴티티 내로 귀속시켜내려는 구글의 정책으로 유비시킬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구글의 정책은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 사용자들은 다양한 플랫폼 속을 이리저리 헤매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하나의 아이덴티티 내에 머물게 됨으로서 사이버 이동에 대한 피로를 절감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장점 외에도 구글의 통합 플랫폼 전략에는 다양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 사안으로는, 사용자들의 '개인정보 수집'에 관한 문제점이다. 일부매체는 구글의 과도한 개인정보 수집에 대한 우려로서 디지털 시대의 ‘빅브라더’라는 지칭으로 경각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사용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무관심한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보가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수집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보안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또 개인의 정보가 '도구'로 전락되어 악의적으로 활용될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우려를 드러내지 않는다. 아마도 그 같은 사안이 '아직까지는' 직접적으로 와 닿아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는 ‘빅브라더’가 등장한다. 빅브라더는 오세아니아라는 국가의 전체군주다. 그는 ‘텔레스크린’이라는 양방향 미디어를 활용해 대중을 선동하거나 사찰한다. 감시와 선동이 횡횡하는 그 세계는 그야말로 숨도 쉴 수 없는 공포의 사회다. 빅브라더의 목적은 단순하다. 체제의 유지다. 만약 그것에 반하는 불순분자가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빅브라더는 해당분자를 잡아들여 쥐도 새도 모르게 ‘증발’시켜버리는 만행을 자행한다. 오세아니아의 국민들은 빅브라더가 구축한 하나의 플랫폼 속에 귀속됨으로서 도구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요컨대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기계와 진배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끔찍한 사실은 그들 스스로가 텔레스크린에 의해 사찰 · 감시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현실을 전혀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우매한 군중이 따로 없다.
하지만 <1984>의 우매한 군중이 머지않은 시기의 우리들 모습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면, 단순히 ‘우매’하다고만은 치부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전체군주와 파시스트 등이 사라진 오늘날의 사회에도 오웰의 망령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난 십여 년 간, 국내 매체 등에 인용되고 있는 <1984>와 관련된 키워드는 해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특히 온라인 사용자들의 개인정보 수집과 관련된 폐해가 심각한 오늘날에 들어서는 그 인용횟수가 눈에 띠게 증가한다. 가령 최근의 기사제목 일부만 추슬러 내도 <SNS의 폭발적인 성장 ‘빅브라더’를 키운다> · <구글 개인정보통합, 빅브라더 논란가열> · <구글 '빅브라더' 논란, 개인정보 노출 상업화 우려> 등으로 손쉽게 발췌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기사는 오웰이 살았던 냉전시대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사안의 내용으로서, 최근의 기술발전 시기에 맞물려 새롭게 부각된 형태의 문제점으로 바라볼 수가 있는 현안들이다.
냉전은 종식되었다. 오웰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혼령은 여전히 남아 디지털 세계 이곳저곳을 비집고 다닌다. 오웰이 그렸던 1984년의 '디스토피아'는, 그로부터 삼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진부하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는 지경이다. 구글의 동영상 플랫폼을 활용한 '싸이 열풍'이 달갑지만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