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엔 꽃이 피고 너머엔 꿈이 있다
일상적인 것에 신이 있다 본문
일상적인 것에 신이 있다. 신은 그 모습을 특별한 것에 감추지 않았다. 파스칼은 모든 것의 합으로서의 신을 모나드라 불렀다. 무수의 실체인 모나드는 보잘 것 없는 이끼나 조악한 해초의 틈새, 그리고 매양 떠 있을 것이라는 태양과 구름 등에 이르기까지 이곳저곳 폭넓게 확장되어 있다.
단토(Arthur Danto)는 <일상적인 것의 변용 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이라는 책에서, 단순한 하나의 사물이 예술로 변화되는 사건에 주목했다. 예술이란, 단토의 시점에 따르자면 후기 예술사 시대(post-historical period of art)에 이르러 철학의 질문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즉 예술이 유사(resemblance)의 재현이라는 모사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때, 비로소 세계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고 파악했던 것이다. 그 의미는 결국 창조의 진원은 특별한 것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닌, 평범한 것에 머문 것, 다시 말해 우리들 주변에 산재해 있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변용을 주재하는 작가로서의 나는, 따라서 일상의 모습 속에서 신의 속성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한 일상은 지금도 머리 위에 떠 있는 저 하늘의 구름, 그리고 오늘 밤의 달과 내일의 태양, 그리고 간헐적으로 지나가는 공중의 정체모를 비행체며 발전소 굴뚝의 연기들이다. 그것은 언제나 A는 B라는 사실로 우리에게 각인되어지는 평범한 사건의 인과며 당연한 결과물들이다. 동시에 C가 D라는 식으로 인지되지 않았던 무지의 사건들이기도 했으며 누구도 모르고 있던 인과율이기도 했다. 그러한 속성은 알지만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며 또한 모르고 있지만 결국은 누구나 알고 있었던 이중적 독사(doxa)의 호혜적 증거들이었다.
진리는 언제나 두 개의 얼굴로 우리를 대면한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대지의 유기적 실상이며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상의 피상적 허상이다. 인간은 눈을 통해 유기적 실상의 겉모습을 확인하지만, 실은 그 내면에 숨은 허상의 의미를 통해 진리를 전면적으로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눈을 통해 눈 너머의 것을 호혜적으로 확인하려는 인간만의 독특한 특색 가운데 하나다. 그러한 특색은, 일상에 숨은 특별한 것의 변용을 가능하게 만들어 평범한 것에 숨은 신의 존귀함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되어주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발생했던 일본 도호쿠 지방의 강진, 그리고 쓰나미로 파손된 후쿠시마 원전.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은 가슴을 부여잡고 텔레비전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계의 외신은 연이은 속보로 지진 소식을 알리고 방사능의 공포를 보도하느라 연일 아수라장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일본의 국내 사정은 평이했고, 어떤 면에서는 그 차분함이 기묘하기까지 했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두 개의 관객은 따라서 기준점을 찾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위인지 판별을 할 수 없었다. 또한 후쿠시마 원전을 기준으로 한 동심원의 파장은, 그 거리가 안전한 장소의 기준점으로 작용해 전 세계 지도위로 줄기차게 그려졌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동시에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이었을까?
이번 전시는 플라톤의 동굴에 대한 비유가 기초를 이룬다. 그리고 그 위에 발현되고 있는 이슈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 전시장을 동굴로 유비시킨다면, 동굴 속 세계는 머리가 묶인 채 연신 보도되고 있는 원전의 공포에 대해서 목도하게 된다. 죄수들의 뒤로는 허위의 불빛이 방사능에 대한 공포를 부각시키거나 은폐 왜곡시키고는 한다. 그리고 원전의 영상 대척점에서는 동굴의 바깥인 에피스테메의 태양이 솟구쳐 있다. 단 한 명의 죄수라도 끈을 풀어 동굴을 탈출한다면, 평범한 하늘의 일상은 신의 거룩함을 반영시켜 줄 것이다.
작가는 도쿄에 주목한다. 동시에 서울에도 주목을 한다. 한 곳은 관조가 제작되는 사고의 장소며 다른 한 곳은 그 사고가 실천되는 행위의 장소다. 한 가지 사태에 접근하는 작가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그것 스스로가 될 수 있는 체현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이 전시를 통해 우리 사회에 번져 있는 방사능의 공포에 대해 조망하고 세계의 본질이라는 식탁 위에 올려두는 것을 소기의 성과로 선언하고 있다. 나는 과연, 일본의 원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가, 한국의 원전공포에 대해서 또한 얼마나 많은 것을 인지하고 있는가? 알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며, 그런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일상적인 것에 숨은 신의 모습을, Radiophobia를 통해 탐구해갈 뿐인 것이다.
- 이 글은 일본 전시(click to go)에 대한 초안으로 작성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