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Fugitive essays
바울의 광야
스티붕이
2010. 3. 4. 12:00
뭘 하고 싶냐고 묻는다. 드립 커피가 모락모락. 로스팅 기계는 멈춰있다. 달리 할 말이 없어서, 높은 곳에 올라가 인류 멸망을 지켜보고 싶다, 라고 싱겁게 말해버린다.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그러자 여자는, 전 사랑을 하고 싶어요, 하고 대답한다.
사랑, 박애, 긍휼 등은 감정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신이 준 혜택 가운데 하나다. 사랑, 아니 감정의 흐름조차 없었다면, 인류는 존속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멸망이 정해져있다. 그리고 뭘 할 것인가? 시한부 삶이 인류에 공히 내려져 있다면, 기쁨 희망 등은 자멸 하고 말 것인가? 또는 희락, 애락 등의 감흥 놀음만 지천을 지배하고 있을 것인가? 고고한 감정이나 쇠잔한 것들이 사방에 존재해 있다면, 어떻게 보아도 그런 것의 버물림 안에, 그녀가 말했던 사랑의 욕구가 고사리 같은 몸짓으로 천천히 고개 들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사랑과 자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광야를 떠났을 것이다.
젊은 여자는, 로스팅 기계 앞에 앉아 커피 쉘을 하나씩 골라내고 있다. 말없는 기계는, 사람의 불을 그리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