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Fugitive essays
의미의 위기
스티붕이
2012. 1. 15. 22:46
뒷산 중턱에는 단청 문양으로 칠해진 전망대가 있다. 하행 길에 그곳에 들려서는, 더운 열기를 잠시 벗어냈다. 그러던 차, 나무에 새겨진 단청의 문양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불현듯 궁금해졌다. 흔히들 생각하기로는, 나무가 썩지 않도록 오방색이나 오간색 등을 추입한 오행에 근거한 칠이라고 떠올린다. 그 정도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단청에 대한 일반적 의미다.
오늘날 들어서는 문양이나 색에 관한 의미조차 옅어져 버려, 실상은 어떻게 보아도 낯설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보고 있지만 보이지 않은 것이 많고 또 느끼고 싶지만 느낄 수 없는 것이 많은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몸은 어느새 한기로 바뀌고 있어 벗었던 외투를 걸쳐 입었다. 동산에 산책 나온 젊은 연인과 노년의 부부, 그리고 아이와 어울리는 시추의 재잘거림 등은 몰려오는 추위도 잊게 만들고 있다. 나를 포함한 이들에게 있어, 우리 주위에 올곧게 솟아 있는 단청문야의 전망대는 있지만 있지 않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는 의미의 위기시대다. 문법적 해석이 힘을 잃은 시대인 것이다. 저자는 죽고 그 틈으로 독자가 되살아나는, 이른바 탈-구조주의 시대인 것이다. 만일 저 단청의 이 문양은 필시 저 뜻이고 이런 해석이었다면, 우리가 사는 현대는 명징한 논리의 폭압에 해석의 자유를 잃게 되고 말 것이다. 단토는 <예술의 종말과 이후>라는 책에서, ‘예술이 그 스스로 의미의 무게를 벗어났을 때, 예술은 비로소 철학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라고 언급했다.
굳이 단청을 버물린 해석을 하자면, 지금 눈앞에 있는 인식대상의 단청은 현존재의 내게는 낯선 사물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존재의 나는, 근대가 아닌 오늘날의 불확정 시대를 살고 있는 인식주체의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대에 있어 선언은 해체를 위한 것이며, 단정은 고착을 파괴하기 위한 의지이다. 그것은 과거의 광장을 폐쇄시키고, 현대의 밀실을 개화시키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내려가는 길은 나무계단이 많다. 애써 옆길로 새자면, 메마른 흙뭉치가 자갈로 미끄럽게 만든다. 우리 집 복도에 서 보니, 뒷산 단청 문양의 전망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토록 오랫동안 저 자리에 서 있었다니, 알고도 몰랐던 내 무지가 각성을 두드린다.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은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며, 모르고 있었던 것 또한 몰랐던 것이 아니다. 산을 완전히 내려왔을 쯤은, 석양의 아름다움이 눈앞에 올라오고 있었을 때였다. 산은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