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ual researchs/Visual semiotics

스티브 잡스의 브리콜라주

스티붕이 2011. 12. 20. 14:25

‎2007년으로 기억한다. 스티브 잡스는 예의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프리젠테이션을 시작한다. 폰, 뮤직, 인터넷 커뮤니케이터. 조용한 장중은 천천히 요동치기 시작한다. 세 가지 아이콘은 한 번씩 회전을 하더니, 하나의 디바이스 위로 흡수된다. 애플의 아이폰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스티브 잡스가 탁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별개의 대상을 하나의 개물(눈 앞에 있음)로 합치는 능력이 대단한 것이다. 개별 대상은 언제나 주체자 주위에 부유해 있다. 그것은 지위 고하 등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동일한 상태로 부유해 있는 사물들이다. 폰은 모바일 디바이스, 음악은 일련의 플레이어들로 또 인터넷은 컴퓨터의 브라우저 상에 부유해 있다. 그와 같은 개별 사물들은 인식주체의 표현에 관한 수단으로 전락될 때, 때에 따라 도구로서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표현주체자로서의 인식은, 자신 주위에 흩어져 있는 도구를 집어 하나로 규정시켜 내는데, 그러한 습성을 보드리야르는 브리콜뢰르의 '브리콜라주'라 일컫는다. 

보드리야르의 브리콜라주는 레비스트로스의 문화인류학으로부터 차용했다. 인류는 일찍이 자신의 주위에 있는 도구로 또 다른 도구를 창안해내 수행을 효율화시켰다. 인류의 그러한 습성은 그러나 현대에 들어 레디메이드, 올인-원 되어 있는 기술결정의 사물에 휩싸여 브리콜뢰르로서의 직관을 천천히 훼손당했다. 편리의 프레그마티즘은 사색과 패시미즘의 어떠한 것도 현대인들에게 용납시키지 않았다. 또 눈 앞에 있는 것은 규정되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됐고, 효과적이지 않으면 '속도의 합리'에 휩싸여 보이지 않게 되기도 했다. 

오늘날의 우리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수의 기업이 지칭하는 소비욕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었으며, 마르쿠제에 따르자면 일차원적 사회의 '일차원적 인간'으로, 하이데거에 따르자면 '익명의 인간'으로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안타깝지만, 흩어진 도구를 하나로 합치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창조하기를 포기한 호모-루덴스와 같은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그런 의미로 보자면 현대를 살고 있는 과거의 원형인과 가깝다. 어떤 것을 깨달았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형질은 다중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들었고 우리가 잃어버린 상상과 직관을 보다 더 가질 수 있게도 만들었다. 선불교에 심취하거나 채식을 즐기는 캘리포니아의 억만장자는, 체제에 속하지 않는 낯섦과 반골인자의 유형 등으로 외면에 머물러 있었을 지 모른다. 하지만 빅 브라더의 처형을 외치던(1984년의 프리젠테이션에서) 당대의 아웃사이더가, 결국은 시대의 인사이드를 규정시키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그러한 현실에 비추어 보자면, 광인(또는 아웃사이더)이 시대를 창조한다는 푸코의 주장은 억지가 아니다. 

창조하고 또 합쳐라, 주위는 새로운 도구들로 지천이다. 스티브 잡스의 여유 있는 미소는 다중과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광기 찬 브리콜뢰르의 미소가 아니었는지, 넌지시 짐작 해 본다. 장중의 환호에 곧 소름은 돋는다, 아마도 잡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