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ual researchs/Visual semiotics

아이콘과 진짜 예술

스티붕이 2011. 12. 5. 11:41


진짜 예술은 없다
. 모든 것은 진실을 지칭할 수 없다. 진실이 진실이라고 말해지지 않을 때, 진실은 진실이 될 수 있는 소지를 지니게 된다. 영원한 변화는 서로가 다가가는 만큼 멀어진다. 그러한 속성은 사태가 빛에 다가가려는 것과 같은 의지로, 사태가 빛에 다가간 거리만큼 빛은 동일한 속도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이것은 진실이 함의하고 있는 근본적인 본질이다. 예술이 예술일 수 있는 것은, 예술이 예술이기를 확인한 적이 없는 인류의 역사에 기원을 둔다. 만약 단 한 번이라도 예술이 예술이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 인류는 어떠한 재현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영원을 나타낸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를 나타낸다. 하나는 진실의 정지를 다른 하나는 진실의 생성을 의미한다. 세계의 사물은 항상 두 가지를 기준으로 한 가지 사건을 이루어낸다. 그것은 양성적 가능태와 음성적 가능태, 양성적 현실태와 음성적 현실태를 구현해 낸다. 양성적 가능태는 인식주체자의 삼차원적 가능성의 동적 움직임을 표현하며, 음성적 가능태는 인식주체자의 이차원적 가능성의 정적 기다림을 표현한다. 또 양성적 현실태는 가능태가 현실 속에 사라지게 된 것으로, 인식주체자의 행위적 관찰이 된다. 음성적 현실태는 이항의 구조로 인식대상의 행위적 피사물의 연속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영원과 변화를 상징하는 주체자의 에너지 수행을 이끌어내는 것인데, 양성태와 음성태가 정지된 사태의 연속을 일으켜내는 속리가 되는 방식이다. 즉 모든 것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공명을 통해 세계에 표출되어지는 수행방식인 것이다.

아이콘을 살펴보자. 인식주체는 대상을 바라본다. 관찰은 주체의 추론을 유발시킨다. 이때 추론은, 차가운 추론과 뜨거운 추론으로 구분된다. 차가운 추론은 학습되어진 것, 다시 말해 문화기호가 주체에 개입 된 최소한의 에너지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을 지칭하며, 뜨거운 추론은 학습되었지만 의도적으로 해석을 거부하는 것 또는 학습되지 않았던 대상을 판단해 내려는 지칭을 말한다. 차가운 추론은 해석에 관한 세 가지 속성이 의식으로 발화되기 전,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상태로 사건의 종결을 맞는다. 큰 흥미를 유발시킬 수 없는 것이다. 반면 뜨거운 추론은 해석에 관한 세 가지 속성과 그것에 내포된 더 많은 요구를 스스로에게 전가를 시켜, 존재하고 있지만 보다 더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대상을 해석해 내는 구조를 갖는다. 이것은 권력자로서의 주체가 인식을 보다 강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결핍의 문화를 저항시켜 내는 것이다. 결핍은 채워야하는 주체의 욕망을 자극해, 상상을 통한 실체의 해석 그리고 판단 등을 유발시켜 모조(시뮬라크르, simulacre)를 발현시켜 낸다. 이러한 모조는 결국 하이퍼-리얼러티(hyper-reality)를 모사시켜 내, 사실보다 더 사실에 가까운, 근본적으로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의 무엇을 사이버-블리츠(cyber-blitz) 해 내는 것이다.

아이콘은 기능주의 시대의 탁월한 잠재적 수행을 풍기고 있다. 아이콘은 정지의 불안을 외치고 있어, 인식주체의 권력에 식성의 환상을 요구한다. 센티멘털리즘의 환상을 자극시켜 내는 것이다. 주체로서의 사람은 대상에 있어 네 가지 취향의 단계를 지나게 되는데, 첫째는 시각의 취향, 둘째는 내용의 취향, 셋째는 욕구의 취향, 넷째는 해석의 취향단계다. 한편 인식주체는 대상인 아이콘의 상위에 부유해서는, 일차적으로 대상의 이미지에 집중을 이차적으로 대상의 해석에 집중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일반적인 아이콘의 표현은 이미지가 그 크기와 표상에 있어 텍스트를 앞서며, 흩어질 권력의 양기를 유혹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러한 유혹의 행위는, 레비스트로스에 비유하자면 인류 최초의 여성성에 대한 부족의 호혜적 전승으로, 한정교환과 상징교환의 외연확대를 위한 인류의 습성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1단계

시각의 취향

형태적 추론 상징

2단계

내용의 취향

의미적 추론 상징

3단계

욕구의 취향

상상적 추론 상징

4단계

해석의 취향

구조적 추론 상징

시각의 취향은 다음의 세 가지 법칙을 따른다. 첫째는 그 크기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의 이동이다. 두 번째는 추론의 쾌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의 이동이다. 세 번째는 고감도 색상/ 대비에서 저감도 색상/ 대비로의 이동이다. 이차원적 인식대상은 음성적 가능태의 단계로, 그것이 현실태의 가능성을 내시하고 있는 상태 내에 시각의 욕구를 촉발시켜 내야한다. 시각은 일반적으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그리고 채도가 높은 것에서 낮은 것으로, 그리고 대비가 큰 것 예를 들어 채도의 대비나 명도의 대비가 형태와 더불어 큰 폭의 것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인식주체에 있어 시선의 우위는 오감보다 아래에 위치할 때도 있어, 때로 감정의 상태에 따라 취향의 감수성이 유발(emotional induction)/ -유발(non-induction) 될 때가 있다.

내용의 취향은 다음의 세 가지 법칙을 따른다. 첫째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일치여부 판단이다. 두 번째는 이미지의 가소성(plasticity)을 통한 판단이다. 이미지의 가소성은 다시 텍스트 기반의 변형가능 판단과 변형거부(불가는 아님) 판단으로 나누어진다. 대게의 경우는 이미지 자체가 가지는(텍스트에 비해) 지칭의 부정확과 모호 등을 토대로 변형가능 판단으로 가소성(이때는 탄성의 저항계수가 제로에 가까이 줄어들 수 있음)을 빚어낸다. 세 번째는 입력을 통한 각인의 판단이다. 내용은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보편적 코드에 기반을 두고 있어 발화의 파롤과 문자의 랑그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 변형의 가소를 지니게 된다. 그러한 관계는 특수적이면서도 보편성을 띄어야 하는 기호전쟁의 다툼을 일으키기도 해, 생성과 소멸이라는 지경의 한계와 문화적 제약을 배면으로 수반하기도 한다.

욕구의 취향은 다음의 세 가지 법칙을 따른다. 첫째는 (이전 단계에서 언급되었던)시각과 의미가 더해진 추론을 통한 상상기대다. 두 번째는 문화와 구조가 더해진 추론을 통한 상상기대다. 세 번째는 비의지적 추론을 통한 상상기대다. 비의지적 추론은 능동적 비의지적 추론과 수동적 비의지적 추론으로 구분된다. 능동-비의지 추론은 인식주체가 대상에 대한 결과 모름의 상상을 통한 자발적 게임의 몰입이며 수동-비의지 추론은 타자가 인식표현에 개입한 예상 밖 결과에 대한 의도된 게임의 숨김이다. 욕구의 취향은 가능태가 현실태로 본격으로 생성되는 단계로, 수신자-발신자 간 최초의 발아가 일으켜지는 단계다. 욕구의 모든 기대에는 상상의 욕망이 그 근저를 이루고 있어, 음성 가능태가 양성의 수행 움직임과 함께 최초의 문화적 억압의 속옷을 벗어던지게 되는 단계이기도 하다.

끝으로 해석 취향은 다음의 세 가지 결론을 따른다. 첫째는 쾌를 느꼈는가? 두 번째는 쾌를 느끼지 못했는가? 세 번째는 불쾌를 느꼈는가? 쾌를 느꼈다는 것은 뜨거운 추론과 차가운 추론을 통한 뜨거운 감정의 이입, 그리고 만족을 의미한다. 쾌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뜨거운 추론과 차가운 추론을 통한 미지근한 감정의 이입, 그리고 만족도 불만족도 아닌 그 중간을 의미한다. 불쾌를 느꼈다는 것은 뜨거운 추론과 차가운 추론을 통한 차가운 감정의 이입, 그리고 불만을 의미한다. 해석의 취향은 그러나 일견 쾌가 느꼈는지 아닌지의 이분법으로 손쉽게 구별 짓기도 한다. 쾌가 느껴진 것은 인식주체의 선(arete)이다. 인식주체에게 있어서의 수행이 쾌의 만족을 느꼈다면 삼차원적 양성주체는 이차원적 음성대상과 호혜적 교환가치를 주고받은 꼴이 된다. 이것은 최초의 원 발신자-수신자 간의 상상적 센티멘털리즘 적 기대관계로, 정적 아이콘은 해방의 본질변화가 추구되었으며 동적 수행자는 추론의 위상변화(X축은 기대 Y축은 실망, 진폭을 통한 변화의 맞춤/ 해석을 통한 감정의 위상 폭)가 추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던 시각의 취향/ 내용의 취향 두 단계는 전건이다. 전건 단계는 가능태 정지를 뜻하며 파르메니데스의 영원한 보수성을 지칭한다. 그리고 욕구의 취향/ 해석의 취향 두 단계는 후건을 지칭한다. 후건 단계는 현실태 생성을 뜻하며 헤라클레이토스의 영원하지 않는 진보성을 지칭한다. 하나의 행위가 수행으로 유발되고 있는 것은, 전건의 가능태와 후건의 현실태가 공명을 일으키는 지점의 발생이다. 영원히 강물에 머물고 싶어 하는 강물 스스로의 속성은 영생을 가리키지만, 개물에 있어 영원한 것은 없다는 또 다른 강물의 흐름은 어제의 강물과 오늘의 강물이 다르다는 불연속 변화를 가리켜낸다. 하지만 영원한 강물도 강의 속성이고 영원하지 않은 강물도 강물의 속성이다. 진정한 강물의 모습은 그 둘의 속성이 하나로 합쳐진 공명의 사태, 조화로운 강물 그 본연의 앙상블이 진정한 강물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중간 어디 내에 진실의 아르케가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르지 않는 강물이 있다. 모래 위에 내가 서 있다. 나는 신을 벗고 강가를 걷는다. 옷을 벗어 머지않아 나신이 된다. 저 강. 우주의 태고서부터 있어왔었던 에피스테메의 흔적들. 날아가는 새를 보며 나는 발을 묻는다. 그리고 걷고 또 걸으며, 어깨까지 진실의 흔적을 갈무리 해 낸다. 시각이 억 겹으로 지났다. 생기 있던 뼈는 으스러지고 녹앗던 살은 붙었다. 동왕공 해가 서왕모 해로 기울었을 때, 늘어나는 그림자는 강물에 흐트러지다가는 금빛 강물과 함께 찬연 석양으로 흘러들었다. 그 순간까지, 나는 단 한 차례도 같은 강물에 몸을 담근 적이 없었다. - 서정호 ytnmania@gmail.com / 2011년 1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