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가위
Sound 0040/ 1984
가위가 있었다면, 태양을 잘랐을 것이다. 떨어지는 책장과 조용한 먼지. 그 사이를 비집던 행복한 햇살. 한낮 정오에 어울리지 않던, 그리고 노을빛 태양. 그것은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소리치고 발버둥 쳤더라도, 솟구치는 것은 혀끝의 침뿐. 나는 조용히 책장을 뒤척였다. 마른 손끝은 육상의 물고기처럼 메말랐고, 세치 혀가 그 위에 민물을 끼얹었다. 평안한 정오의 어느 날, 그러나 알 수 없는 적막의 고요가 싫어, 끝없는 허무를 찾던 전철의 어떤 자.
육중한 전차가 어느 역에 도달하자, 쇳소리에 책장 위 태양은 사라졌다. 나는 읽고 있던 문맥을 떨쳐내고, 기분 묘한 환상에 휩싸였다. 현실에서 벗어난 비현실의 미래가, 어슴푸레 감지되는 것이, 현재와 다투었기 때문이다.
과중한 업무 부담이 나를 짓눌렀고, 나는 형용하기 힘든 심리적 생고에 갇혀있었는데, 그것은 정오와 맞지 않던 노을빛 햇살에 깨끗이 사라졌다. 눈앞 근시적 희비가 나를 목 졸랐다면, 원시적 희비의 또 다른 동공이 나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그렇게 눈 떠 책장을 내려다 보니, 한줄기 석양이 고단한 샐러리맨을 구원시켜, 그 자 나는, 지친 육신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림자는 가위 모양을 만들었다. 연거푼 손가락 가위질은, 공중의 변형곡예였다. 나는 가위 바위 보를 만들어 책장 위 그림자와 한바탕 대결했다. 행복한 햇살은 정직해, 하는 아이의 음성이 귓전을 맴돌았다. 암울하고자 하는 순간, 정오의 빛깔과 맞지 않던 노을빛 태양은, 어두운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소리치고 발버둥 쳤더라도, 사냥개 같은 침 덩이는, 연거푸 책장 끝을 적셔 놓고 있었다. 태양은 잘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