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Sound of city
냉담한 사색
스티붕이
2012. 7. 20. 14:46
Sound 0039/ 1984
그렇다. 우리는 동일한 시스템에 살고 있다. 동일한 알고리듬에 갇혀, 동일한 상태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은, 기분 나쁘게 신비롭다. 하나의 틀을 만들어, 그 속에 스스로 들어가 생활한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체계화 된 군무의 벌레나 동물 또는 프로그램으로 짜여 진 로봇 등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사람이, 그것도 창조로 생장하는 인간이 그렇다는 것은, 어쩐지 믿기 어려울 만큼 신비롭다.
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렵다. 의지를 꺾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 틀의 이른바 룰을 따른다. 법규와 법칙의 조항 등을 규정해, 그것을 합목적인 의미로, 또 가치지향의 사고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가를 냉정히 생각해본다면, 인간 객체 누군들, 그것을 스스로 원해서 따른다고 명세, 서약 한 적은 없다.
그렇다고 사회의 통상적인 룰을 거스른다는 것이 좋다고는 볼 수 없다. 어떤 의미로 이 세계가 온전히 구성되어 생장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인간 구성원의 보이지 않는 합의로 인해 가능한 면도 크기 때문이다. 반골기질, 암적인 분투로 그것을 거스를지라도, 전체의 일부에 의한 미미한 크기에 국한 되므로, 그것은 전체를 변환, 규명 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만일 세계를 구성하는 시스템이 무너졌다고 가정해보자. 사람은 제도화 된 규약이나 법칙 등이 없이,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본능적 사회에 내몰리고 말 것이다. 본능이 원하는 대로, 의지가 다다르는 대로 사회는 급격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생명과 쾌를 담보로 내세운 지존의 등장은 당연할 것이며, 약육강식의 동물적 습성이 인간 사회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말 것이다.
세계는 이미 그런 시대를 겪어왔다. 지나왔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의 합의로, 대의 정치와 경제적 이데올로기 등을 규합해 사회에 적용해 왔다. 그것은 시스템의 일부가 됐다. 그러나 외적인 성장의 어느 면은, 기실 내적 본성의 대부분을 억제시키고, 또 기능과 의지 등을 감퇴시키는 역기능으로도 작용도 해왔다. 사회와 그곳을 사는 인간은, 어떤 면으로도 지난 시절의 그들보다 성숙해 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의 기질을 물려받은 인간은, 또한 불행하다. 동물적 속성도 절반을 가지고 세계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강제로 억눌린 본성의 대부분은, 다른 기질로 외부에 분출된다. 욕정의 불만도 그렇고, 쾌의 불충만도 그렇다. 그것은 인간 외면의 더러운 고름으로 도로를 가득 매우고, 보이지 않는 다락방 구석구석을 채워갔다. 만족되지 않던 동물적 기질은, 인간의 사고를 때로 황패하게 만들었다. 넘치는 것도 문제지만, 부족한 것도 문제가 됐다.
중요한 것은 영육의 조화다. 본능의 억눌림도 아니고 본능의 무절제도 아니다. 다만 두 가지가 온전히 조화된 인간 본연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시스템의 탄생이다. 요원이다. 냉담한 강제 보다는, 온유한 권고가 필요할 것이며, 무서운 반대보다는 냉정한 찬성이 필요할 시기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의 보다 성숙한 의식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한쪽에 치우친 사고보다는, 양면을 아우르는 다면의 시각이 필요하고, 양극에 대한 배려가 중요해 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 시기를 기다린다. 누구랄 것도 없이, 인간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곳. 피안의 천국이 아닌, 지상에 존재하는 최적화된 세계. 남녀가 만족하고, 극단의 양면이 인정할 수 있는 관용. 그리고 온전한 배려. 그 시기가 온다면, 사회는 사랑의 향수가 넘쳐날 것이고, 아름다운 향연이, 때로의 냉담한 사색, 사유 등의 고락과 함께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어 낼 줄 것이라 생각한다. 어두운 시대의 한 시기, 그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