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Fugitive essays

영육의 주도권

스티붕이 2010. 3. 15. 08:33


이른 새벽, 잠이 남아있다. 졸린다. 눈 감으면 영육 분리가 느껴진다. 영도 육도 서로에 지쳐 잠에 취하고 싶어 한다. 무거운 육신을 지배하는 사람 영혼은, 그것 하나로 존재해 스스로 생활해 있다. 인간이라는 유기물로 들어온 영혼은, 거대한 물질로서의 집합체를 가꿔나간다.

불협일 때가 있다. 영육이 서로를 거부하는 때다. 육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자는 스스로를 광포한 곳에 전신을 내 맡긴다. 영혼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자는 육신의 탐욕, 요컨대 식탐과 배설 그리고 이기 등의 물질적 모든 것에 진절머리를 낸다. 육체 소원을 애써 거부해 내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영육 계약 관계는 지나칠 경우 끝을 맺는다.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자살하는 것이다.

졸려서 죽을 것만 같은 어느 순간. 육의 이기가 영혼을 선점하려 든다. 그러면 영혼 생장의 존재는 눈을 부비며 육체 요구를 걷어치우려 한다. 이불은 쌓여있다. 그러나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의 질문 앞에선, 돌아서는 침대 뒤로 공허한 바람이 몰려든다. 모르겠다.

음습한 구석, 방안 후미진 곳에서 대답이 들려온다. 단순하다. 사랑받기 위해서다. 그것은 본래적 갈급, 사랑의 갈망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말을 잇는다. 공동체에 속한 대자적 존재는 타자로부터의 열망, 그리고 관심 있는 시선 등으로 사랑의 전주를 초대받는다. 본래적 존재의 영혼은 그 스스로에 대한 사랑으로 존립을 키워나간다.

두 가지 세계가 잔혹한 갈등을 겪을 때 신은 개입한다. 영육 이원의 경우, 어느 한 곳이 주도권을 전임 받으면 소외한 면은 분노한다. 그것은 동시적이면서 다면적으로 발현한다. 존재해 있는 두 세계는 갈등 치유를 위해 찰나의 순간에도 쉼 없이 주도권을 주고받는다. 신은 이원 된 갈등 구조에 있어 그 스스로가 매개념이 된다고 나지막이 속삭여준다. 사람에 잠재된 깊숙한 광인은 그를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비웃는다. 공허한 권태를 벗어나기 위한 신 스스로의 유일한 방안은 사람이다. 사랑받기 위한 타자로서의 존재, 육신 그리고 영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