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과 광인
Sound 0030/ 1984
어둡고 밝은 면, 전차 객사에 명암이 떨어졌다. 채광 좋던 정오의 어느 날, 간밤 불쾌한 꿈을 떠올렸으나, 눈부신 햇살에 암울한 몽환은 사라졌다. 나는 고백했다. 세계는 밝고 맑다. 지키고 보호할 가치가 있다. 그곳에 깃든 저열한 어둠은 몰아내자. 결박시키자.
해맑은 소녀가, 객사 어느 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새하얀 편지지를 긁적였다. 벗에게 띄우는 편지거나, 연인에게 부치려는 편지리라. 미소는 깃들었고, 흰색 프릴의 상의는 한들거렸다. 소녀는 예뻤다. 눈부셨다. 햇살 양 볼이 단아해, 천사의 향기를 머금은 얼굴은 또한 반짝였다. 나는 선로 어귀에 멈추어 서서는, 소녀의 전신을 머리부터 발끝 까지 찬찬히 더듬었다. ‘아름다운 것, 그것은 소유다. 나만의 것, 가지고 싶어.’
어둡다. 망상이 현실에 다가섰다. 내장 하복에 자리한 본능의 어둠이, 호시탐탐 밝음 속 전복을 노리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틈을 허한다면, 그것은 정오의 밝음서 주도권을 탈취 할 것만 같았다. 내 눈은 소녀의 허벅지에 이르러 폭발했다. 심장이 뛰었고, 어둠이 그녀의 음부 사이를 파고들었다. 나는 소녀의 치마를 찢었다. 속옷을 벗겨, 편지를 뜯고 불태웠다. 왼손에 쥔 몽블랑 만년필은, 그녀의 입술에 문신을 새긴다. ‘가면’
천사는 사라졌다. 두려움, 근심, 염려 등이 번연한 어둠 앞에 고개 숙였다. 어둠에 빙의된 전신은, 기뻤다. 도도한 얼굴, 자애의 표정은 깨졌고, 소녀 본연의 모습, 알몸의 그녀가 거울 앞에 처량히 서있다. 그것이 밝다던 당신의 본래다. 네 몸엔, 기만과 부패, 세인 속 성공이 가식으로 새겨져있다. 보라, 본래의 문신을. 지울 수 없어. 소녀는 눈물 흘렸다.
전차가 들어섰다. 소란한 안내 음이 객사에 울려, 참새 때가 차양 뒤로 달아났다. 아이들이 까르르하고 웃는다. 엄마 손에 이끌린 녀석들은, 연신 세계의 어떤 것에도 기쁘다는 태세다. 정차 된 전차의 유리는, 뜨거운 태양을 반사해 기염을 토했다. 그늘이라도 녹일 참이다. 앉아있던 소녀는 가방을 챙겨, 황급히 객차 속에 사라졌다. 부끄러운 음부의 몽상이 깨졌다. 하찮은 전차의 입사로, 어둠은 압사됐다. 정오의 태양은, 밝음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세계다. 어떤 어둠도, 밝음 속엔 장구히 존속할 수 없던 것이다.
밝던 어둡던, 햇빛의 세계는 찬국 밑 연옥이다. 반면 달빛의 세계는, 지옥의 문이다. 육중한 전차가 말했다. 너희의 세계는, 달의시기에 어둠을, 해의시기에 밝음을 주인이라 칭했었지. 해지던 노을을 기억하니? 밝음이 사라질까 두려워 떨던, 그 태양의 모습을 말이야. 하지만 흑암이 물러 갈 새벽녘, 어둠도 떠나간다. 너희에 세계엔, 세 가지 주인이 살고 있어. 밝고 어둔 것, 그리고 양비한 경계.
나는 말없이 객차에 올랐다. 내 세계엔, 절대가 없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 각계엔, 각계의 주인이 있다. 더불어 무한한 지평선, 땅과 하늘이 부딪히는 접점의 어느 곳에, 양쪽을 부인하는 경계가 있다. 나는 저곳 어디 즈음일까, 알 수 없다. 전차 어느 구석엔, 초로의 광인이 떠들고 있다. 무엇이 불평인지, 연방 허공에 대고 삿대질이다. 거부치 말아. 뜯겨진 세인의 군무는 더럽다. 허나 치부치 말아, 구토한 음식을 새에게만 주지 말고! 열차는 쇳소리를 울리며, 고고히 상행선을 질주했다. 태양이 부서졌다. 소녀의 쾌감? 광인의 눈 속에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