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Sound of city

거울 없는 도시

스티붕이 2012. 7. 19. 18:21

Sound 0012/ 1984   

"나는, 순수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여자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탈리안 로스트를 한 모금 마셨다. 새까만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며, "다른 남자를 만나려고 그랬겠죠." 하고 말했다. 창안과 밖의 경계에 비친 그녀는 짧은 치마를 끌어당기며, "다른 남자를 만나려 순수해지지 않았다는 건가요?" 하고 물었다. "순수했던 과거는, 남자를 만나기 전이었습니다." 나는 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드립 커피의 수증기 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손님 몇몇이 카운터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이탈리안 로스트를 두어 모금 삼켰다. "한 잔 더 마실까요?"

'또각, 또각'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바닥을 달궜다. 긴 생머리가 치마까지 닿아 있었다. 나는 그녀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소리는, 어른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요." 하고 말했다. "전 이미 어른인걸요." "언제부터?" "사랑하고 이별했을 때부터" "어른이 되니, 두렵지 않던가요?" "자연스러웠어요. 몇 번 연애를 하고 몇 번 이별을 하니,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이탈리안 로스트를 주문했다. 여자는 탄산수를 한 병 주문했다. 카운터의 전자음이 그녀 앞에서 울렸다. 말끔한 생머리에 균형 잡힌 몸매가, 생명 없는 전자음과 닮아있었다. 나는 커피를 받아들고 여자를 뒤따랐다. "왜 제 앞으로 걸어가지 않죠?" "겸양입니다." 그녀는 내 말에, 푹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같은 남자가 세상에 많았다면, 저는 순수해져 있었겠지요?" "남자를 만나고 이별을 했던 것은, 또 다른 진화의 원인입니다." 그녀는 탄산수 뚜껑을 비틀었다. 길게 뻗은 손톱은, 각양 문양으로 화려하게 번져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예의 조심, 얼음 담긴 머그컵에 음료를 붓는다. 그리고 수줍은 듯 들이켰다. 나는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다, 핑크색 옷을 입은 소녀가 뛰어가자, "첫 남자를 사랑할 때 사랑했었나요?" 하고 소녀를 뒤좇으며 물었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정수리가 나무의자 위에 솟아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사랑했었습니다." 짧은 치마 위로 차가운 머그컵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증오했었죠." 몇 점 눈물이 흘렀다. 나는 이탈리안 로스트를 들이키며 말했다. "사랑은 이기적입니다. 연인을 사랑하기보다는, 연인을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우리는 한동안 침묵했다. 뜨거운 드립커피와 차가운 탄산수가 테이블에 놓여졌다. 빨간 립스틱 자욱이 흰색 머그잔을 물들였다.

나는 창가에 투영된 그녀의 은색 하이힐을 내려 보았다. "당신이 선택했던 것은, 또 다른 연인을 찾기 위한 동물적 진화의 투사였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만남과 이별은 외형적 치장의 진화였던가요?" 하고 물었다. "껍데기 사랑이 원했다면, 그런 진화였겠죠." "그럼 제 순수는 어디 갔죠?" "당신의 첫 번째 연인이 가져갔습니다." "그게 보이나요?" "네, 당신 동공에 첫 남자의 순수가 구류돼 있거든요." 그녀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유리에 비친 그의 흔적을 발견할 요량으로 면면을 더듬어 나갔다. 질주하는 창밖 도시민의 그림자가 그녀를 상쇄시켰다. 그러자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하고 당혹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신을 비추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회반건물과 정체차량의 번잡함 등이 창밖 캔버스에 투영됐을 뿐이었다. 슬픔에 잠긴 그녀는 유리를 붙들고 일어섰다. 마침 드립커피의 수증기 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단아한 흑색 정수리에, 흰색 구름이 원근으로 합성되었다. 매끈한 그녀의 다리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었다. 그녀는 은색 하이힐을 벗고 나무 의자에 올라섰다. 그리고 천구에 매달린 별빛에 동공을 비추며 말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거울 없는 도시에 살고 있었군요." 여자의 머리 위는, 노란색 할로겐 등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이탈리안 로스트를 두어 모금 삼켰다.